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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6·25 때 쓰고 버린 단테 - 고석호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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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오발탄>(유현목, 1961)

6·25 때 쓰고 버린 단테

/ 고석호

 

누가 역사가 정의롭다고 했던 걸까? 인간처럼 동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종은 없었다. 하지만 역사는 찬란한 영웅들과 그들을 추앙하는 승전의 영광으로만 기록된다. 정작 역사의 저편에 쓰러져간 민중들의 삶의 고통은 묻지 않은 채, 학살로 쌓아 올린 영웅의 이름과 그들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고고히 이어져 온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영화 <오발탄>은 전쟁이 남긴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생생히 보여준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는 전쟁만큼이나 짙은 암흑시대였다. 그 암흑시대에는 죽은 자와 죽인 자가, 어쩌다 살아남은 자와 반드시 살아남으려는 자가,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지만도 못한 자와 살아 있지만도 못하지만 살아남으려는 자가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서로 생의 투쟁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오발탄>은 이러한 6·25 전쟁 직후 살아남은 자인 참전군인들과 수많은 전쟁 난민들이 잃어버린 삶의 가치들 속에서 방황과 탐욕과 부정의(不正義) 앞에 생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는 짙은 어둠이 깔린 거리에서 한 무리의 군인이 술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정처 없이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암흑시대에 오갈 데 없이 버려진 이들의 처지 같다. 특히 그 가운데 전쟁에 참여한 중대장 경식(윤일봉)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랑하는 여인 명숙(서애자)이 기다린다. 하지만 전쟁으로 잃어버린 다리와 함께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6·25 때 쓰다 버린 단테라는 말을 남기고 그를 외면한다. 소설 신곡에서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지옥을 그려낸 작가 단테는 지옥과 같은 곳에 살아 있는 경식의 처지를 의미한다. 사랑과 순결의 가치가 사라져 버린 명숙은 물신주의 앞에 몸을 파는 양공주로 살아간다.

 

달빛은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존재로서 고독함과 외로움을 상징한다. 영화는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고독함을 인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어둠의 시대를 자신의 이름처럼 하얗고 밝은 달빛과 같이 홀로 버텨내는 설희를 통해 암흑시대에 외로움과 싸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참전군인 영호(최무룡)는 전쟁의 야전병원에서 만났던 사랑하는 여인 설희를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설희는 달빛이 비치는 높은 계단 꼭대기 층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외로움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지하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지만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설희의 가슴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호를 만난 순간 설희는 그 외로움이 달래어질 것에 행복해했다.

 

인물의 깊은 외로움은 창문 사이로 비쳐오는 달빛 아래서 영호에게 안기며 실존적 고독을 고백하는 설희의 모습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연민과 고갈된 사랑과 매정한 현실 앞에서 한 가련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독함을 드러낸다. 그와 함께 매일 찾아오는 아래층 시 짓는 청년을 통해 이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와 같은 몽상에서 이뤄짐을 보여준다. 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영호는 마구간 같은 집들로 빽빽이 찬 난민들 집터인 해방촌에 사는 자신의 희망이 없는 삶과 물신주의와 부정의가 판치는 사회 앞에서 마침내 극단적 결심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난민 가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철호(김진규) 가족은 마구간처럼 허름한 집에서 가자, 가자를 외치며 전쟁과 이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어머니(노재신),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며 말이 없어져 버린 철호 부부, 몸 파는 양공주 명숙, 신문팔이하는 아들과 홀로 남겨진 막내딸을 보여준다. 철호 가족은 가족의 연민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오직 생존하기 급급하다. 그곳에 마구간에 놓인 동물처럼 남겨져 있다.

 

마지막, 아내를 잃은 철호가 이를 악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모습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입고 목적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민중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민중이 전쟁이 남긴 상처와 잃어버린 삶의 기반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갈등하며, 부정의하고 자기 배반 적인 선택을 통해야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삶의 갈피를 찾지 못해 저마다 외로이 울부짖으며 서로를 둥지에서 밀어 죽여야 살아남는 뻐꾸기처럼 냉혹한 현실에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영화의 중요한 기능은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의 조각을 모아 극적인 이미지의 연출로 보여주는 데 있다. 오늘까지 6·25 전쟁은 영웅들과 그들이 남긴 이념으로서만 기억될 뿐 전쟁이 남긴 수많은 희생자와 민중들의 삶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발탄>은 한국의 가장 암흑기인 전쟁 직후의 철호 어머니가 끊임없이 외쳤듯 지나가 버리기만을 기다렸던 가슴 아픈 역사의 기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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