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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현재를 살게 하는 멈춤 - 박형순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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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윤희에게>(임대형, 2018)

현재를 살게 하는 멈춤

/ 박형순

 

스크린 너머로 기차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곧 이어진 화면은 기차 안이다. 어디로 가는지, 또 누가 탔는지 알려주지 않고 창 너머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서야 오타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딸 새봄(김소혜)을 보는 윤희(김희애)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오랜 시선 위로 떠오른 윤희에게라는 제목은 기나긴 시간 동안 윤희를 향하고 있던 쥰(나카무라 유코)의 마음이 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또 다른 생각이 들게 만든다.

 

쥰이 윤희에게 오타루의 모습을 설명하며 보여주는 전경들이 이어진다. 이곳은 너와 어울리는 곳이라고 말하는 쥰의 말과 시선에는 그 전경 안에 이미 윤희가 깃든 듯하다. 하지만 이어서 먼저 보여준 장면 속에 실제로 일본으로 온 윤희가 들어가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쥰이 상상한 모습과 현재의 윤희가 섞이는 모습은 다르다는 것을 관객이 알게 해준다. 하지만 윤희의 현재를 알지 못하는 쥰의 말은 그 풍경 속에서 헤매는 기차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듯하다. 윤희의 일상은 출근하는 차량에 올라 식당에서 밥을 하고 어두워져 돌아오는 길에 담배 한 대 피우고 귀가하는 것의 반복이다. 임대형 감독의 전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에서 주인공인 모금산(기주봉)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반복된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게 윤희의 일상은 아무런 자유의지 없이 이뤄지는 듯 걷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쥰은 걷고 또 걷는다. 일상의 모습을 보여줄 때도 계속해서 걷고 움직인다. 집 앞에서 만나는 인호(유재명)와 편지 때문에 멈췄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윤희와는 다르게 장례식이 끝난 뒤 서성이던 쥰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쥰은 어머니가 한국 사람인 반쪽짜리 일본인으로, 나이 많은 미혼 여성으로, 성 소수자로 일본에서 살아간다. 그런 쥰이 마주한 일본 사회의 차별은 화면 안으로 불쑥 손을 내미는 류스케(야쿠마루 쇼)처럼 동의 없이 들어온다. 쉽게 한국 남자를 만나보라고 하는 친절을 가장한 류스케. 그와 함께 있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초점거리를 달리해 일본 사회의 차별을 더 극명하게 느끼게 한다. 차별적 행동을 저지르는 류스케는 카메라 가까이 크게 그리고 흐릿하게 보여주며 쥰이 누구에게서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작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쥰은 마치 과녁의 중심처럼 그 말로 상처받는 입장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쥰은 술 한잔하자는 료코(타키우치 쿠미)의 추파에 좋다고 하면서, 동물병원에서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때는 도망치듯 말을 돌리며 월(고양이)을 찾아다닌다. 쥰이 자신이 성 소수자라는 사실보다 한일 혼혈이라는 것을 더 숨기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윤희와 헤어져야 했던 과거 한국의 상황에서도, 상처받고 자신을 숨겨야 하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도망치고 있다는 말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아주 작아질 때까지 화면 밖으로 걸어가는 쥰의 발걸음 소리에 기차 소리가 겹친다.

 

움직이지 않고 멈춰선 쥰의 시선은 동경하던 윤희를 떠올리며 먼 곳을 바라본다. 료코와 함께 월(, 고양이)을 볼 때도, 윤희의 카메라를 메고 불쑥 찾아온 새봄을 마주할 때도, 결국 윤희를 생각하며 편지를 쓸 때도. 줄곧 걷던 걸음을 멈춰 섰을 때조차 그리운 마음을 윤희에게 보내듯 또 윤희와 함께했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 반복된다. 쥰의 그리움을 담은 기차는 서로 만나기까지 한국과 일본의 일상을 오가며 이어진다. 마치 그것은 차량과 차량이 서로 이어져 달리는 기차 그 본연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리고 쥰과 윤희를 이어주고자 하는 마사코(키노 하나)와 새봄의 닮음으로도 표현된다. 처음 마사코가 쥰의 편지를 우편함까지 가져가는 숏과 쥰과 윤희가 만난 뒤, 우편함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새봄의 숏은 닮은 듯 이어진다. 함께 달리지 않으면 기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마사코가 쥰의 편지를 가지고 우체통에 넣고, 편지가 우편함에서 새봄으로 이어지고, 새봄에서 윤희에게 전해진 편지는 쥰의 마음에 화답하듯 윤희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 전에 걷는 모습이 없던 윤희가 기차 소리에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줄곧 눈높이를 맞추고 고정된 윤희의 일상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마치 기차가 처음 출발할 때처럼 거칠게 흔들리며 걷기 시작하는 윤희를 쫓아가고 윤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폐쇄된 기찻길이 있는 곳에서 사는 쥰은 그곳에 유입된 이후로 갇힌 듯 방황하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료코에게 기껏 낸 용기라는 게 자신을 숨기라 말한다. 자신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아끼는 마음이 쥰에게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쥰은 자신을 안아 주는 마사코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던 쥰의 움직임이 마치 자신의 편지가 윤희에게 닿은 걸 아는 것처럼 주변을 바라보며 천천히 멈추어 간다. 계속해서 걷던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 전반과는 다르게 쥰은 먼 곳을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마사코의 얼굴을 옆에 앉아 바라보며 자신과 닮은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경험한다. 그리고 윤희가 쓰던 카메라를 메고 온 새봄에게서 윤희와 함께 했던 과거와 새봄이라는 현재, 변해왔을 윤희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주변의 변화를 느끼며 돌아보기 시작하는 쥰은 자신과는 다르게 용기를 내어 일본으로 온 윤희와 마주하며 현재라는 시간에 방점을 찍는다.

 

걸어오는 윤희의 발소리가 멈춰있는 쥰의 모습과 겹치며 둘의 달라진 모습을 한 화면에 담는다. 그 순간 멈춰진 듯 윤희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쥰과 머뭇거리다 쥰의 눈을 마주하는 윤희.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살던 둘이 만나 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걷고 있는 모습은 강렬한 현재를 보여준다. 화면이 어두워진 뒤에도 오랜 시간 두 사람의 걷는 발소리를 들려준다. 쥰의 마음이 윤희에게 전해지기까지, 윤희가 용기를 내 쥰을 마주하기까지의 그 지난한 시간과 앞으로 두 사람의 시간을 응원하는 감독의 마음이 관객에게 전해진다. 이후 일상이 반복되듯 또다시 하늘을 보며 멈춰선 마사코를 기다리는 쥰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반복된 장면은 윤희와의 만남 이후 쥰의 변화를 행복을 표현한다. 예전에는 쓸데없다고 했던 눈은 언제 그치려나라는 마사코 말을 이번에는 쥰이 하늘을 보며 말한다. 그 모습은 그동안 자신을 기다려주고 사랑해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며 현재를 살아갈 쥰의 미래를 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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