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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실존의 한가운데서 - 고석호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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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돈>(로베르 브레송, 1983)

실존의 한가운데서

/ 고석호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눈치챌 수 없게 다가와 비극을 남긴 채 떠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삶이 고귀한 것은 비극의 운명에 놓여 있는 실존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한 가운데서 비틀어진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오직 잘못 맞춰진 퍼즐의 조각처럼 일그러진 삶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서 완성되고 받아들여질 뿐이다. 영화 <>은 돈을 매개로 시작된 운명의 비극 앞에 놓인 한 남자의 실존적인 삶을 다룬다. 그 어떠한 꾸밈도 가식도 없이 담담하게 선택되어간 비극적 운명에 놓인 인간을 나타낼 뿐이다.

 

영화는 마치 한 인간의 실존적 삶처럼 그 어떤 가식적인 포장도 하지 않는다. 보통의 영화를 이루는 극적인 연출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 가식적인 연기는 이 영화에서는 배제된다. 오직 무덤덤하게 이루어지는 배우들의 절제된 몸짓과 몇 마디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자칫 너무 지루하고 단조로울 수 있는 일상을 영화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에서 감독이 원하던 것은 꾸밈없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런데 단순하리만치 절제된 장면에 비해 영화는 여러 가지 층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의 물신성과 타락, 부정의가 판치는 사회에서 버려진 인간의 극단적인 최후, 의도치 않은 사건들의 연쇄로 커져 버린 아이러니한 인생의 비극 등 다양한 층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층이 얽혀질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절제된 몸짓과 대사가 남긴 빈 여백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돈의 물질성과 운명의 비극성의 얼개는 주인공 이봉(크리스티앙 파테이)의 사랑하는 딸이 죽고 그의 아내까지 떠나게 되면서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이봉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베개에 파묻혀 흐느끼는 모습은 애처롭다. 이제 삶의 의미가 사라진 남자는 바뀌지 않는 운명 앞에 극단적 살인자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나약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한다. 자기를 돌봐준 가족을 도끼로 살해하기 직전까지 돈을 내놓으라 협박하는 주인공의 광기에 이른 모습은 모든 비극의 씨앗이었던 돈에 대한 원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다.

 

한편 영화 <>이 상징하는 한 측면엔 제목처럼 이라는 물질성이 만든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내재한다. 계속된 재판에서 가난한 주유소 노동자인 주인공은 어떤 물증 없이 진술로 인해 판사에게 억울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 장면은 자본주의의 물질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처한 부도덕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영화 <>에 나타나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사회의 비판적 시각은 오늘까지도 극단화된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비극은 2000년 전 고대 그리스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이러한 비극은 인간에게 떼어낼 수 없는 주제이며 해결되지 않는 실존적 운명이다. 특히 감독 로베르 브레송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 어떤 그럴듯하게 꾸며진 인간의 존재보다도 비극적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앞서고, 오직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만이 남겨져 있다고 했다. <>은 의도치 않은 사건들로부터 비극적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인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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