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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사랑> 리뷰 : 맨드라미의 꽃말처럼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2. 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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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사랑>
맨드라미의 꽃말처럼

 

 영화는 새천년을 목전에 둔 1999년 말엽, 영미(이유영)에게 도래한 인생의 변곡점으로부터 시작된다. 흑백 화면에 비친 영미의 삶은 칙칙하고 시들시들하다. 낮에는 전자제품 부품 공장 경리과장으로 온종일 장부의 숫자만 들여다보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픈 큰어머니의 수발을 든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가는 하루에서 유영이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없는 듯 보인다. 분명 영미는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모르는 눈치이다. 무미건조한 영미의 삶에 한 줄기 빛과 같이 나타난 도영(노재원)이라는 존재는 물가에 내던진 돌멩이처럼 그녀의 인생에 파문을 일으킨다. 언제나 그렇듯 직장 동료들의 무시와 빈정거림을 참아내고 홀로 점심을 먹을 때, 급식판을 마주대고 앉아 인사를 건네준 도영으로부터 영미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마음을 전달받았으리라. 소시지 반찬을 덜어주고, 요구르트를 가져다주는 도영의 작은 친절은 영미가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용기 낸 영미의 마음이 보답받지 못한 채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렸지만 말이다.

 

 영미는 도영의 공금횡령을 숨겨주려 고군분투하다가 큰어머니 장례를 치르던 세기말의 마지막 날, 공금횡령 방조죄로 체포된다. 취조실에서 떡국을 먹으며 조사를 기다리는 영미의 깡마른 손아귀가 유독 안쓰럽다. 거칠고 상처투성인 저 손으로 도영을 위해 밤낮으로 거래처 미수금을 확인하고 재봉틀을 돌리던 영미의 정성 어린 마음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도영이 횡령을 저지른 이유가 아내 유진(임선우)(명품 쇼핑으로 발생한) 카드값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영미의 얼굴은 하관이 잘린 채 화면에 드러난다. 마치 물에 잠겨 숨을 쉬기 어려운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얗게 질린 영미의 표정을 보며 비극적 결말이 초래한 진득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환각을 느낀다. 하지만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어 9개월의 형기를 마친 영미를 보여 준다. 이날을 기점으로 영미의 나날을 컬러 화면에 비친다. 흑백에서 다채로운 색감으로 전환된 편집으로부터 영미의 삶에 생기가 부여되리라는 기대감이 부푼다. 아이러니하게도 영미의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사건은 그녀를 감옥에 가게 만든 장본인, 유진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로 만들어진다.

 

 교도소 앞, 빨간 승용차가 한 대가 출소를 마친 영미 앞에 선다. 자동차 유리창이 내려가고,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 나타난다.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도도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유진은 얄밉게 아름답다. 선글라스 하나 제 손으로 벗지 않고 함께 온 준(문동혁)에게 하인 부리듯 명령하는 유진에게서 명품에 환장할 것 같은 허영과 교만이 흘러넘친다. 신경질과 무례함으로 무장한 유진에 대한 혐오가 피어날 무렵, 영화는 휴게소 화장실로 배경을 옮겨 유진이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지체 1급 장애인임을 드러낸다. 혼자서 휠체어를 몰 수도 없어 영미에게 의지하여 화장실에서 볼일을 해결하는 유진이 조금은 애처롭게 보인다. 무모한 용기의 성과(?)로 집도 직업도 가족도 잃은 영미는 어쩔 수 없이 유진의 집에서 잠시 기거한다. 유진의 수발을 들며 보내는 시간들 속에서 영미는 유진을 둘러싼 여러 사정들을 알아간다. 도영의 등골을 빼먹는 줄 알았던 유진이 사실은 빚 독촉에 허덕이는 도영을 위해 위장결혼을 해준 것, 도영이 갚아온 카드값은 사실 유진의 조카 미리(장성윤)이 만든 빚이라는 것, 그리고 미리는 유진이 유전질환의 후과를 각오하고 낳은 친딸이라는 것.

 

 유진의 과거가 밝혀질 때마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다치고 아파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동시에 무모하고 대책 없었던 유진의 사랑이 영미의 사랑과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홍대의 어느 모텔방, 미리와의 다툼 끝에 옷에 실례를 한 유진을 씻기는 영미와 그런 영미의 화상 자국을 만져보는 유진. 유진은 영미의 등에 퍼진 화상 자국이 꼭 맨드라미와 닮아있다고 말한다. 이후 장면에서 유진과 영미의 대사에서 맨드라미의 꽃말-‘치정(癡情)’시들지 않는 사랑’-이 언급되는데, 이 말이 꼭 유진과 영미의 사랑과 닮아있다. 영미와 유진은 너와 내가 서로가 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귀중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리석을 정도로 상대를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제쳐두고 무조건적인 마음을 내어주는 용기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영미와 유진을 통해 새삼 알아차린다. 영화의 말미, 유진과 도영을 위해 원격 면회를 마련하고 유진의 집을 떠나는 영미의 당찬 뒷모습에서 세상에 필요한 다양한 사랑의 형태 중 한 조각을 발견한다. 맨드라미의 꽃말처럼 아둔하리만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자양분 삼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피어나는 순간이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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