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
결국엔 사랑이라...
안사(알마 포위스티)와 홀라파(주시 바타넨) 두 사람은 불안정노동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저 오늘 하루만 생각하며 버텨낼 뿐, 그들에게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것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안사는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다 보니 웃을 일은커녕 집에서는 대화를 나눌 기회 자체가 없다. 동료들과 합숙을 하는 홀라파라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열악한 환경의 숙소에서 개인의 영역이란 있을 수도 없고 그저 함께 술이나 마시는 것이 그의 주된 여가생활이다. 두 사람의 고독하고 소외된 삶은, 국가를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대 사회의 빈곤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괴롭히듯 끝없이 따라붙는다.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일 같지만 어느 누구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전쟁의 참상은 라디오를 켤 때마다 그들과 관객을 집요하게 쫓는다. 심지어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 서먹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고 라디오를 틀었을 때에도 어김없이 전쟁 소식은 쏟아진다. 결국 안사의 입을 통해 ‘망할 전쟁’이라는 말을 내뱉지만 실은 이 전쟁은 설사 고개를 돌린다 해도 결코 달라질 것 없는 우리 모두의 냉혹한 현실임을 상기시키고, 나아가 영화로 기억하고 박제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여기쯤에서 감독이 은퇴를 번복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일선에서 물러났던 감독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되돌아올 때에는 정말 하고픈 얘기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개인의 은퇴와 번복 그 자체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그것에 집착할 일은 아니지만, 예술가를 다시 창작의 자리에 서게 만든 동기와 그 결과물은 분명히 놓치지 말고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작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을 함께 이겨내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으리라. 그리고 결국엔 사랑에 그 해답이 있음을, 작고 힘없는 존재들을 존중하고 아끼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대하고 희망을 키우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실, 영화에 문외한인 필자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라는 감독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80분의 짧은 로맨스영화는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영화는 평양냉면이나 명동의 어느 유명한 곰탕 같은 느낌이 든다. 슴슴하고 도대체 뭔가 확 잡아끄는 맛이 아닌데도 묘한 중독성을 가진 음식과도 같이 관객의 마음을 샤르르 사로잡는다. 영화는 무심한 듯하지만 온기 어린 시선으로 비루한 노동자의 삶을 보듬고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 배우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색하고 뚝뚝 던지는 유머는, 문득문득 실소를 터뜨리게 만들며 힘겨운 현실의 풍파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한다. 대화대신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영화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깊은 공명이 가능하게 만든다.
각자일 때 안사와 홀라파의 현실은 너무나 고달프고 외로웠으며 미래는 물음표로 가득할 뿐이었다. 첫 만남에 둘은 바로 서로를 마음에 두지만 계속 엇갈리고 다투며 도무지 연결되지 않은 채 세상의 변두리를 외로이 부유한다. 그러나 결코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숱한 시련을 이겨내고 죽음의 고비까지 넘기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둘이 사랑을 시작했다고 해서 더 이상의 시련이, 헤어짐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전히 고용은 불안정하고 앞에 놓인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삶도 사랑도 결코 쉬이 얻어지지 않고 늘 어려움에 부딪히고 위기를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기에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나고 오늘을 살아낼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안사가 안락사의 위기에서 구출한 강아지에게 ‘채플린’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90여 년 전에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년)>를 통해 찰리 채플린이 세상에 전했던 메시지를 망각의 위기에서 되살려 본다. 2023년의 마지막날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 관객리뷰단 이호준
<노 베어스> 리뷰 : 불가시(不可視)적 감옥 (0) | 2024.01.22 |
---|---|
<티처스 라운지> 리뷰 : 품을 내어 주는 곳이 학교라면 (1) | 2024.01.18 |
<레슬리에게> 리뷰 : 꽤 괜찮은 사람이 되기까지 (0) | 2023.12.29 |
<조이랜드> 리뷰 : 남과 여, 그 서글픈 경계에 대하여 (1) | 2023.12.27 |
<괴물> 리뷰 : 흠(欠)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넘어 다다른 세상에는 (1) | 2023.12.1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