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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랜드> 리뷰 : 남과 여, 그 서글픈 경계에 대하여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12. 2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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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랜드>

남과 여, 그 서글픈 경계에 대하여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인류가 가꾸어온 세상은 분명 발전하고 있고, 그 구성원들은 보다 합리적인 가치관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믿음 앞에 무거운 한숨이 밀려든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무수히 외쳐대는 인간의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인간 앞에 남자와 여자라는 굴레를 씌운 채 그에 걸맞은(그렇다고 세상이 우겨대는) 역할과 책임을 부여한다. 영화 <조이랜드>는 가부장제가 깊이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 벌어진 하이더르(알리 준조)와 뭄타즈(라스티 파루프) 부부의 비극을 통해 가혹한 성 역할의 강요가 얼마만큼 비인간적인 인습인지 통렬히 비판한다. 하이더르는 유약하고 다정한 성정을 가진 남자이고, 뭄타즈는 강단 있고 기개가 넘치는 여자이다. 하여, 안타깝게도 하이더르와 뭄타즈는 파키스탄 사회 내에서 요구하는 남자다움'여자다움이라는 자격에서는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인다.

 

 하이더르의 형수 누치(사르와트 길라니)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염소를 잡을 때, 하이더르의 아버지 아만(살만 피르자다)은 응당 남자가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라며 하이더르에게 염소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휠체어를 탄 노인이지만 여전히 집안을 군림하는 아비를 거역할 수 없기에 하이더르는 염소의 뿔을 움켜잡고 바닥에 눕혀 압박하지만, 염소의 목에 칼을 찔러 넣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린다. 이윽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남편을 보다 못한 뭄타르가 하이더르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염소의 숨통을 끊어낸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아만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다. 남자답지 못한 자식이 한심하고, 여자답지 못한 며느리가 마뜩잖은 눈치다.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영화 속에서 하이더르와 뭄타즈는 아만의 눈빛과 같은 사회의 서늘한 시선을 내내 감내해야 한다.

 

 비바(알리나 칸)의 등장은 하이더르와 뭄타이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형수가 출산한 병원에서 피범벅이 된 옷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들어오는 비바에게 한 순간 매료된 하이더르는 그녀가 자신을 백업 댄서로 고용할 뮤지션이라는 걸 알고는 원치 않았던 극장 무용수 일을 단숨에 수락한다. 하이더르의 취직으로 인해 뭄타이의 커리어에 제동이 걸린다. 하이더르의 형 살림(소하일 사미르)은 뭄타이에게 하이더르가 백수에서 벗어났으니 미용사 일을 관두고 누치와 함께 집안 살림을 전념하라 말한다. 누치와 아만도 살림의 말에 거들며 뭄타이에게 전업 주부의 삶을 강요한다. 뭄타이는 하이더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권력 앞에 하이더르는 저항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화장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뭄타이의 희망 어린 포부 따위는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뭄타이의 뒷모습에서 생기를 잃은 절망감이 감돈다.

 

 뭄타이가 집안일에 갇혀 지내는 동안 하이더르는 비바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하이더르의 눈을 빌려 비바의 삶을 관객에게 비춘다. 타고난 성을 버리고 자신이 바라는 성으로 살아가는 비바에게 세상은 조롱과 배척으로 그녀의 용기를 비난한다. 극장의 간판 여가수는 공연 휴식 시간을 빌려 열정을 다해 춤을 추는 바비를 보며 트랜스젠더 따위를 누가 보겠냐며 무시한다. 공연장의 남자들은 바비의 물건’(아마도 성기를 의미하는 말)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얹어가며 바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여성칸에 앉은 비바에게 옆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은 비바를 향해 당신은 남성칸으로 가야 한다며 힐난한다. 이토록 노골적인 따돌림 속에서 비바는 자신의 욕망(뮤지션으로서의 성공, 호감을 느끼는 상대와의 연애 등)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비바의 질긴 생명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탓인지 시들 거리던 하이더르의 일상에는 이전과 다른 생기가 감돈다. 옥상에서 하이더르가 배운 안무를 지켜보던 뭄타이가 질투심을 느낀 건 하이더르의 생기가 그녀가 이전에 지녔던 활기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조이랜드>라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하이더르와 뭄타즈가 감당해야 할 현실은 잿빛 돌무더기처럼 무미건조하고 무겁기만 할 뿐이다. 서로가 짊어질 역할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야속한 세상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초록빛 네온사인으로 휘감긴 비바의 방 안에서 하이더르가 말했던 모기와 암탉의 사랑 이야기가 비바와 하이더르의 위태로운 사랑뿐만 아니라, 영화 속 청춘의 삶을 예언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한 번의 키스를 나눈 후 모기는 조류독감, 암탉은 뎅기열로 죽어버렸다는 슬픈 결말이 선조가 직조한 구조 아래 짓눌린 후대들의 말로와 닮아있다. 출산을 한 달 앞둔 뭄타이의 자살과 그녀의 장례를 마치고 카라치 해변으로 향하는 하이더르. 카메라의 시선은 천천히 쉬지 않고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하이더르를 마지막으로 담아낸다.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서글픈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두 사람의 선택은 말로 담을 수 없는 슬픔만을 남긴다. 이 슬픔은 도대체 언제쯤에야 끝이 날지 알 길이 없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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