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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분의 일초> 리뷰 : 마음의 주먹을 펴라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12. 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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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분의 일초>

마음의 주먹을 펴라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가는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의 힘,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시청각적 아름다움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이 영화의 매력에 감탄하게 된다. 검도라는 격투기가 가진 역동적이면서도 정적이기도 한 양가적 특성을 다루는 감독의 영민함이 배우들의 열연과 어우러져 기존의 스포츠영화나 성장영화와는 결이 다른 심리극의 요소까지 가미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두 인물의 물리적인 힘의 대결뿐만 아니라 그 힘의 대결을 유발하는 등장인물 간의 감정 대립이 관객의 공감을 얻고 흡인력을 발휘함으로써 결말에 이르는 영화의 전 과정을 집중력의 흐트러짐 없이 끌어간다.

 

 영화에서 선과 악을 대표하는 인물을 앞세워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확실한 긴장 유발 장치이겠으나 갈등 자체에만 치중하면 자칫 식상하고 단조로움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에는 아주 명확해 보였던 선악의 구분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모호해지고 그 경계조차도 불분명하게 흐르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악을 응징하고 복수하려는 선(실은 악과 대치하고 있을 뿐 절대적 선은 아니다)이 이미 스스로 새로운 악이 돼 버리는 모습은, 이제는 오히려 악한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구악과 대비되기까지 한다. 승패를 예단할 수도, 어느 한쪽을 응원할 수도 없는 관객의 입장은 난처한 상황으로 몰린다.

 

 분노와 복수심을 가슴에 담고 살아온 김재우(주종혁)는 호면 속에 자신의 표정과 감정을 숨긴다 생각했으나 그의 몸과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대상이 형을 죽인 황태수(문진승)인지 아니면 그를 감싸 안은 자신의 아버지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다. 무조건 이겨 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경직시키고 죽도의 움직임을 무디게 만들어 상대에게 빈틈을 노출한다. 분노의 강도가 클수록, 복수하고 싶은 욕구가 커질수록 힘을 빼야 할 오른 주먹을 더 강하게 쥐게 되고 그 바투 잡은 검 끝은 상대가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다. 반대로 황태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가벼운 마음과 몸짓으로 쉽게 상대를 제압한다. 김재우의 실체를 알고 나서 잠시 흔들렸던 모습도 금세 마음을 가다듬으며 빈틈이 없다.

 

 경쟁이나 다툼에서 근원적인 문제는 외부에 있지 않고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에 있음을 처절한 패배로부터 체득해 가는 김재우의 모습은 검도의 특성과 잘 맞물려 자연스럽게 관객의 공감을 부른다. 마지막 결투에서 김재우는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는다. 상대가 아닌 자신에 집중하니 주위는 일순간 사라지고 황태수와 단 둘만 남는다. 하지만, 그의 공격을 피하는 황태수의 민첩한 몸놀림에 김재우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려 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김재우의 머리를 향해 여지없이 떨어지는 황태수의 죽도. 바로 이 순간에 달라진 김재우의 회심의 일격이 나온다. 좀처럼 힘을 뺄 수 없어 물집이 터지고 터져 피투성이던 오른손을 비로소 놓을 수 있게 된, 그 움켜쥔 주먹을 펴는 만분의 일초에 김재우는 황태수의 목에 죽도를 날린다.

 

 대사보다는 호면 속 불타는 눈동자, 가쁜 호흡과 기합, 마룻바닥을 울리는 발소리로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고 긴장을 유지하는 이 영화는 다분히 동양적 철학과 미학을 담고 있다. 특히, 긴장을 이완시키거나 여백을 만들어내는 장면의 미장센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긴장감을 한껏 올리며 시작하는 오프닝에서 재우가 탄 택시가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좇는 장면은 나무의 다채로운 색채와 도로의 유려한 곡선에 더불어 아라베스크의 선율이 절묘하게 어울리며 탄성을 자아낸다.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숱한 굴곡을 예견하는 장면이지만 높은 곳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엔딩에서도 승리의 환희나 희열에 들뜬 김재우의 모습이 아닌, 하얀 눈송이를 향해 내민 그의 손을 비춘다. 이제는 물집이 사라지고 평온하게만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음악 덕분에 더욱 홀가분해 보인다. 국내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검도를 소재로 첫 장편영화를 만들어낸 김성환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관객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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