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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저물어가는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11. 1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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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저물어가는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

 

 오후 5시와 7시 사이는 (지리적 위치와 절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대이다. 낮에서 밤으로 진입하는 이 구간에서 사람들은 일과를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며 다음 날을 준비하곤 한다. (지구적 관점에서) 하늘을 지배하는 천체가 바뀌는 주기에 맞춰 인간을 비롯한 생물체들은 일일의 생활을 조율하고 적응해가고 있는 것이다. 생애주기를 이러한 하루에 빗대어 본다면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의 시간은 인간은 그동안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저물어가는 인생을 정리하는 기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주희(김주령)가 지나 보내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동안 벌어지는 소소한 만남과 사건을 비춘다. 예기치 못한 죽음의 위기 앞에 선 있는 주희는 영화의 시간 내내 알게 모르게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있다. 그러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예전과 같은 속도와 온도로 성실하게 보내고 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늦은 오후의 2시간 동안 관객은 주희라는 한 평범한 인간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녀를 지켜보는 관객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보고픈 갈망을 느낄 수 있다.

 

 주희는 10여 전 자신의 꿈인 연극배우의 길을 접고, 지금은 대학교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열심을 다해 지나온 시간으로부터 주희가 얻은 건 지치고 병든 심신뿐이다. 영화의 오프닝신, 흉부 CT 너머로 의사의 소견(유방에 악성종양으로 의심되는 조직이 발견되었다는)을 전해 듣는 주희의 얼굴에 깃든 낭패감과 허망함이 안쓰럽다. 주희가 지금껏 쌓아 올린 나름의 최선에 대한 응답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그녀 자신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갑지 않은 비보를 짊어진 채 주희가 향한 곳은 그녀의 교수연구실이다. 좌절에 흠뻑 빠져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주희지만, 그녀는 본래의 일상을 훼손하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교수연구실을 무대로 주희의 오후를 조명한다. 주희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는 동안 그녀에게 배운 학생들이 셋이나 연달아 방문한다.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희를 보고 있노라면 닮고 싶은 중년 어른의 한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주희가 내뿜는 성장하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과 중중과 배려가 가득 배어 있는 말투,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짚어주는 조언과 위로를 보며 그녀가 존경받을 만한 참된 어른으로 살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단순히 주희의 2시간 만을 보고 그녀의 지나온 삶의 희로애락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다. 화면 너머에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한 순간들이 수북이 쌓여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적재된 감정과 기억들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멈춤과 되돌림이 부재한 시간의 속성은 야속하리만큼 가차 없지만 그렇기에 유한한 인간의 삶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는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 주희의 2시간을 흑백 화면으로 표현하고는 주희의 2시간 뒤에 이어진 장면에서부터 화면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컬러 화면의 장면들은 아마도 주희가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을 그린 듯 보인다. 색상의 유무로 구분된 시간의 경계로 인해서인지 앞선 주희의 두 시간에서 현실감이 빠져나간다. 지금까지 지켜본 주희의 일상이 주희를 추억하는 누군가의 심상을 대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럼에도 그녀를 추억하는 이들의 공간 속에서 주희가 살아있는 듯한 감각으로 가득하다. 거실 한편에 모여 앉은 추모객들에게 선보이는 연극의 한 대목은 주희와 그녀의 전 남편 호진(문호진)의 한 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녀 배우가 식탁에 서서 주고받는 시선과 대사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이 물씬 풍긴다. 무대 위 두 남녀의 결말이 현실에서는 이별로 끝이 났음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무대 위에 선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따뜻해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인간은 지나온 궤적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할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그 시간을 보내온 존재들에게 새겨져 있으니까.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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