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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리뷰 : 다시, 길이 움트는 곳을 바라보며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10. 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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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다시, 길이 움트는 곳을 바라보며

 

 윤철(박종환)은 꿈이라는 파도에 떠밀려 어영부영 현실에 당도한 인물이다. 10여 년 전,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신진 조각가는 이제 주문받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납품하는 인테리어 업자가 되어 있다. 꿈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해 이상(理想)을 향한 전진을 중단한 윤철이지만, 그는 멈춰 선 자리에서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고 있다. 일상에 발을 내딛고 건실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체취가 윤철에게서 마구잡이로 뿜어져 나오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자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휘청거리듯 보인다. 윤철의 위태로움은 곧 그의 쓸쓸함으로 이어진다. (화성 모형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찰흙 덩어리 위에 작은 사람 모형을 조각하던 윤철이 작업을 멈추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사람 모형을 긁어 없애버리는 장면에서 윤철의 손길은 먹먹하리만큼 쓸쓸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사람 모형이 왜 이리도 윤철과 닮아 보이는지 왠지 모를 서러움에 울컥 눈물이 맺힌다. 취기가 살짝 오른 듯 보이는 윤철이 무의미라는 가사를 연거푸 뱉어내며 흐느적대는 모습에서도 이와 결이 비슷한 서글픔이 묻어난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아니면 잘 살아내고 싶은지 가늠할 수 없는 윤철의 얼굴이 처연하기 짝이 없다.

 

 혼탁한 불안함으로 둘러싸인 윤철의 세상에 다행스럽게도 빛을 밝혀주는 이가 둘이나 있다. 윤철의 딸 지나(이연)과 윤철의 연인 영지(강경헌)가 바로 그들이다. 지나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미술에 재능을 보이지만, 고등학교 생활과 입시 준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불교의 귀의하여 수행자의 길을 택한다. 영지는 재발한 암으로 인해 힘겹게 투병 생활을 견뎌내고 있다. 지나와 영지는 윤철 못지않게 세상의 풍파 앞에서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깊은 밤, 홀로 숙소에 멀뚱히 앉아있는 지나의 뒷모습과 윤철의 집 마루에 기대앉아 잡초가 무성한 마당을 바라보는 영지의 옆모습에는 분명 외로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지나와 영지의 얼굴에서 윤철과 같은 서글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두 여인에게서는 윤철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단단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의 차이를 필자는 고립(孤立)과 자립(自立)의 의미를 비교하며 찾아본다. 윤철과 지나 그리고 영지는 모두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홀로 서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외따로 떨어진 자체만으로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자신을 외면한 윤철과는 달리, 지나와 영지는 그들이 놓인 자리를 똑바로 응시한다. 윤철이 눈을 가린 동안 그가 선 자리는 서서히 깎여나가 윤철을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 지나와 영지는 한 곳으로 모은 시선을 향해 그들의 길을 닦아낸다.

 

 윤철은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나아가는 지나와 영지 곁에 기대어 자신의 불완전한 보행의 균형을 해소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윤철은 속세를 벗어나 행자의 삶을 보내는 지나의 곁에서 공양주 노릇을 하며 함께 수행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와 함께 아픈 영지를 돌보며 그녀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나와 영지의 삶에 발맞추어 지내는 윤철의 표정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들과 함께라면 윤철은 더 이상 허무와 고독에 잠식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윤철에게 홀로 서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한다. 지나는 스님이 되기 위해 강원(講院)으로 떠나고, 영지는 깊은 산속에 자리한 호스피스 기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울 윤철이지만, 지나와 마지막으로 아빠와 딸로서 나눈 산길에서의 대화(자신도 해보았으니, 아빠도 해보면 된다라는 식의 메시지가 담긴)가 그의 등을 따뜻하게 떠밀어주는 것 같다. 지나의 법명(法名)인 도맹(道萌)으로부터 윤철은 자신이 디디고 선 땅 위에서 길이 시작됨을 느꼈으리라. 비록 홀로 가는 길 위에서 외로움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 삶의 숙명이지 않을까 싶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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