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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파이어> 리뷰 : 불완전한 연소의 희망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9. 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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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파이어>

불완전한 연소의 희망

 

 발트해 인근 해변, 네 명의 남녀가 지붕에 올라 저 멀리 화염에 휘감긴 숲을 응시하고 있다. 회백색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하늘은 불게 타오른다. 지붕 위 네 사람의 시선에서 그날의 광경은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었을까?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는 그의 열 번째 장편 영화이자 물, , 흙을 주제로 한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역사 3부작이라 칭해지는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에 이어 원소 3부작의 첫 번째 작품 <운디네>(2020)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감독은 인간의 절망과 함께 사회의 음습하고 냉혹한 속성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전작의 그림자에서 조금은 많이 빗겨나간 모양이다. 여전히 감독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요소들과 어그러진 인간관계의 단상이 영화 곳곳에서 배어져 나오고는 있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작품은 가볍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설렘과 기대와 같은 것과 닮은 이 분위기로부터 감독은 시대의 아픔을 통과하고 있는 청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어파이어>는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이 차기작 클럽 샌드위치를 퇴고하기 위해 방문한 발트해의 어느 별장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레온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그다지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펠릭스(랭스턴 우이벨)와 함께 그의 집안 별장으로 향하던 길, 갑자기 차가 고장이 나 도로 한가운데에서 멈춰 버린다. 전화도 불통이라 어쩔 수 없이 묵직한 여행 가방을 짊어진 채 울퉁불퉁한 숲 속 길을 걸어 별장으로 향한다.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을 기대했건만, 별장 안은 예상치 못한 투숙객의 잔여물로 어지럽혀져 있다. 식탁은 치우지 않은 음식과 접시들로 범벅이 되어 있고, 벗은 옷가지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다. 불청객의 등장으로 독방을 쓰지 못하게 된 것도 화가 나는데, 얇은 벽을 뚫고 관계를 즐기는 남녀의 신음에 레온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일까. 레온은 영화 속 거의 모든 장면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심란한 레온에게 측은지심이 피어오르려던 순간도 잠시, 아침이 맞이한 별장은 생기와 활력이 넘쳐흐르며 레온의 우울 따위는 한 귀퉁이에 몰아넣는다. 그 밝은 기운의 중심에는 나디아(파울라 베어)가 있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그리고는 자전거를 타고 풀숲에 감추어진 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특별할 것 없는 행동이지만 나디아는 너무도 아름답다.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나온 레온은 그런 나디아를 응시한다. 관객은 이미 레온의 눈빛만 보고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레온의 뜬금포에 가까운 사랑고백 장면보다 훨씬 전에 그가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하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인연과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이라.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을 감출 수 없건만, 레온은 여유와 유흥을 만끽할 수 있는 휴양지에서의 모든 만남과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처음부터 그러하였지만) 나디아의 등장부터 레온은 참으로 사랑하기가 어려운 인물의 전형이 되어간다. 레온이 내뱉는 대사와 표정은 대부분 비관적이고 심드렁하며 무례하기까지 하다. 나디아가 초대한 식사자리에서 수상안전요원 데비트(에노 트렙스)의 현란한 화술과 재담을 듣고 있는 레온의 얼굴에는 그를 향한 멸시와 경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의 원고를 읽고 진심 어린 비판을 한 나디아에게 문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아이스크림 종업원이라며 폄훼하는 레온의 뒷모습은 한없이 옹졸하다. 매사가 짜증으로 가득 차 있고 한숨이 끊어내지 못하는 레온을 보며 호감을 느끼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추해 볼수록 못난 모습 투성이인 레온이건만, 왠지 모르게 마음껏 싫어할 수가 없다. 필자는 비겁하고 한심한 레온에게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야 만다. 어쩌면 대다수의 관객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저마다의 약한 부분이 있고, 감추기 위해 온몸으로 독을 뿜어대는 시기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내심 레온도 나디아를 비롯한 청년들과 발트해의 여름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레온을 억누르는 건 레온의 이었다. 담당 편집자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와 미팅 전까지 퇴고를 끝내기 위해 그리도 고립되었건만, 퇴고는커녕 헬무트로부터 출판 거절을 통보받는다. 사실, 자신의 소설이 별로라는 건 레온이 누구보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실의 무게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레온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레온이 이라는 방패에 숨어 있는 동안 다른 인물들은 각각의 문양과 색감으로 빛나고 있다. 펠릭스가 휴양을 즐기며 시험 삼아 바닷가에서 찍은 인물 사진들은 레온의 원고보다 헬무트의 관심을 받는다. 데비트는 펠릭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에 빠진다. 나디아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스라를 낭송하며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있는 힘껏 발화하는 세 사람 곁에서 레온은 더욱 움츠러든다.

 

 레온의 주변은 레온을 제외하고 삶의 가치를 매개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서서 충분히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연소하는 물질이 그러하듯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지면 타오름을 중단하고 재가 되어 사라진다. 영화는 펠릭스와 데비트의 비극에 발화하는 물질의 속성을 집어넣어 보여준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새카만 재가 되어 사그라져버렸다는 결말이 아이러니하게도 슬프지가 않다. 펠릭스와 데비트가 생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밝게 빛났으리라는 확신이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후회를 남겨두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두 사람의 마지막을 보며 레온은 어쩌면 인생은 사랑을 매개로 타오르는 것임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 나디아와의 조우에서 레온은 이전처럼 자신 앞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충분히 타오르지 못했던 자신이 다시 타올라 빛을 발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이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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