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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리뷰 : 이름의 무게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9. 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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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이름의 무게

 

 <한 남자>는 집요하리만큼 누군가의 뒷모습을 좇는다. 영화를 장식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내(로 추정되는 실루엣)의 뒷모습이 비스듬히 겹쳐진 그림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화면을 가득 메운다. 중첩된 실루엣에 일순 사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라 착각에 빠지지만, 이내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면 뒷모습 너머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야 마땅함을 깨닫는다. 어쩌면 그림 속 사내는 그 안의 세계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림 속 사내의 뒷모습에서 고독과 우울이 짙게 스며 나온다. 그림 속 사내의 주변은 잿빛을 띤 먹구름을 닮은 침울한 분위기에 잠식되어 간다. 이윽고 사내의 뒷모습에 가려진 얼굴이 궁금해지고, 사내가 응시하고 있는 사내의 앞에 놓인 또 다른 뒷모습의 정체가 알고 싶어진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키도(츠마부키 사토시)의 뒷모습과 처음 본 그림 속 사내가 계속해서 겹쳐 보인다. 키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X(쿠보다 마사타카)라 칭해져 버린 한 남자의 삶이 있다. 키도는 X의 지난 행적을 추적하며 X에게 자신의 삶을 투사(投射) 한다. 점차 겹쳐지는 키도와 X의 인생을 통해 관객은 인간이 짊어진 이름의 무게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키도와 X의 삶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있다. X의 아비는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인한 사형수이다. 어린 X의 기억에서 아비는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그가 무참히 죽인 일가족의 집에서 걸어 나온다. 얼굴을 뒤덮은 피와 땀을 닦으며 이를 지켜보는 아들에게 피로 적신 지폐 한 장을 쥐여주는 X의 아비에게 짐승의 냄새가 느껴진다. 무자비한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도 X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란 상당했을 터인데, 성인이 된 X의 얼굴은 틀로 찍은 듯 아비와 판박이다. 그리하여 X에게 거울을 본다는 게 세상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행위였으리라.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도 X는 자기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부들부들 온몸을 떤다. X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와 자기 얼굴을 때리고 싶어서 복싱을 한다는 X의 고백이 아리도록 서글프다. X의 과거를 조사하는 키도는 그의 삶에서 자신의 현실을 겹쳐본다. 키도는 인권 변호사로 일하며 일본 사회에 긍정적인 부분에서 일조하고 있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출신성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극의 초반부에서 키도는 조센징(ちょうせんじん, 朝鮮人)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근거 없는 멸시와 낭설에 있는 힘껏 미소를 지으며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키도가 X의 지난 시절을 마주하면서 점점 날카롭고 예민해지더니 그 자신과 X를 업신여기는 상대를 향해 서류철로 책상을 내려치고 고함을 내지르는 모습으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키도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나, 키도는 X의 인생에 스며들고 있다. X를 알아가는 시간이 키도의 일상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며 본래의 키도가 유지해 온 가정의 안락이 위기를 겪는다. X의 조사를 관두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아내 카오리(마키 요코)의 말을 뒤로한 채 멍하니 텔레비전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는 키도. 이목구비가 뭉개지고 겨우 형태만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X가 그린 얼굴을 지운 초상화가 떠오른다. 이윽고 키도는 X가 살기 위해 자신의 이름(하라 마코토, 소네자키 요시히코)을 버린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X가 살기 위해 얻은 타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이름도 본래의 주인이 살기 위해 버린 것임을 알아차린다. 키도와 함께 타니구치 다이스케의 삶을 추적하며 관객의 입장에서 원래 이름의 주인이었던 다이스케(나가노 타이가)의 지난 과거도 알고 싶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이 호기심에서 한 걸음 나아가지 않는다. 나고야의 한 카페에서 오랜 연인 미스즈(세이노 나나)와 재회한 (과거 다이스케였던) 그의 얼굴만 한 번 비출 뿐, 그에게 자초지종을 추궁하지 않는다. 영화의 태도는 키도를 통해 보이는데, 미스즈와 함께 나고야까지 갔음에도 키도는 (과거 다이스케였던) 그를 만나지 않는다. 키도 역시, 이름의 무게를 짊어진 자의 고됨을 알기에 더 나아가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선 것이 아닐까.

 

 다이스케의 이름으로 리에(안도 사쿠라)와 함께 보낸 39개월은 X에게 있어 가장 인간다운 행복을 누린 시기였을 것이다. X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와 함께 한 시간은 확실한 진실이라던 리에의 결의에 찬 표정만 보아도 X는 최선을 다해 행복하기 위해 리에와의 시간을 보냈음을 느낄 수 있다. X를 짓누르던 이름의 무게가 리에로 인해 조금은 가벼워졌기를 바라본다. 새 인생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누구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도 X는 리에에게 다가가기를 멈추지 못했다. 살고 싶은 X의 간절함을 알 것 같아서 X의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이미 벌어진 사고를 돌이킬 수 없음에도 리에와의 생활이 좀 더 지속되었길 바라고야 만다. 그래서일까. 리에와 다이스케가 처음 만나는 세이분도 문구점에서의 장면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X는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빗속에서 문구점으로 들어와 정전으로 어두워진 실내를 밝혀주고, 다시 빗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등장으로 (손님 응대를 위함이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리에는 흘리던 눈물을 그친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X의 말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음을 확신하는 장면이다. 빗속으로 사라지던, 리에에게 도시락을 건네받고 출근하던 X의 뒷모습이 새삼 그리워진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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