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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인간적인 기량에 대하여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6. 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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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인간적인 기량에 대하여

 

 바닥을 채는 줄넘기 소리와 발을 구르는 소리, 케이블 로프가 금속 기둥과 마찰하여 발생하는 파열음, 육중한 모래주머니를 타격하는 주먹의 소리가 저마다의 규칙적인 빠르기로 체육관에 울려 퍼진다. 공간을 가득 채운 소음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생기를 돋우는 리듬을 만들어 간다. 이러한 선율이 체육관에 활기를 채워갈 때 적막한 분위기를 감싼 케이코(키시이 유키노)가 체육관에 들어선다. 환복을 하는 케이코를 장면에 그녀를 소개하는 자막이 오른다. 화면 가운데 자리한 자막은 케이코는 이미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데뷔전에서 KO 승을 거머쥔 어엿한 프로 복서라는 정보를 전달한다. 3~4 문장으로 끝마친 이 문장을 영상으로 표현했다면 박진감과 패기로 가득한 작품 하나가 나왔을 텐데.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법한 사건을 너무도 싱겁게 관객에게 내어준 건 아닌지 맥이 풀린 것 같은 아쉬움이 잠시 감돈다. 이내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케이코를 통해 비추고자 하는 삶의 모양이 기존에 필자가 경험했던 스포츠 영화와는 조금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움트기 시작한다.

 

 케이코는 선천적인 장애로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필담이나 수어와 같이 눈을 통해 주변과 소통한다. 케이코가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려면 케이코가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관객의 감각은 자연스레 시각에 집중하게 된다. 카메라도 관객의 시선에 발맞추어 케이코를 담아낸다.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고 되도록 고정된 자리에서 케이코를 지켜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 덕분에 관객은 보다 차분하게 케이코를 관찰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담긴 케이코의 삶은 단조롭다. 이른 아침에 기상하여 강 주변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낮 동안에는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체육관에서 복싱 훈련을 한다. 이 단순하고 고요한 일상을 묵묵하게 살아내는 케이코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고 불안해 보인다. 그 이유는 케이코가 부치지 못한 편지로부터 가늠할 수 있다. 케이코가 정좌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간 글귀(쉬고 싶다, 체육관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송구하다와 같은)로부터 그녀가 짊어진 선수로서의 부담감과 부채감을 느낄 수 있다.

 

 케이코가 쓴 편지의 수신지는 체육관 회장(미우라 토모카즈)이다. 회장은 청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체육관에서 거절당했던 케이코를 받아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케이코가 회장에게 얼마나 큰 감사와 신뢰를 가지고 있을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케이코의 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회장이 남긴 답변이 인상적이다. 케이코가 지닌 선수로서의 재능을 묻는 기자에게 회장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재능이 없다.”라고 답한다. 케이코가 작은 체구와 짧은 리치 그리고 청각 장애라는 복싱 선수로서 매우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에 관객의 입장임에도 회장의 대답은 조금 서운하게 느껴진다.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회장은 재빨리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인간적인 기량이 좋다고 해야 할까....... 케이코는 눈이 좋아요. 계속 보고 있어요.” 회장이 말하는 기량은 추측건대, 기량(伎倆, 기술상의 재능)이라기보다는 기량(器量, 사람의 덕량과 재능)에 가까울 것이다. 케이코의 눈으로부터 가능성과 인간의 됨됨이를 알아본 회장의 혜안(慧眼)의 본질을 곱씹어 본다.

 

 필자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small, slow, stedy>로부터 회장이 꿰뚫어 본 케이코의 자질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케이코의 내면에는 불안과 긴장이 깃들어 있다. 심지어 스파링 훈련 중에 맞으면 아픈 것이 싫어서 뒤로 물러서는 케이코이다. 이토록 나약한 케이코이지만, 그녀의 약점은 그녀의 성실함으로 인해 상쇄된다. 케이코의 훈련 일지는 단조로운 그녀의 일상이 사실은 케이코의 작고, 느리지만, 꾸준한노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물임을 증명한다. 힘들고 지치고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할 일과를 반복해내는 케이코가 새삼 대단하다. 동시에 왜 이렇게까지 열심을 다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일말의 해답은 케이코가 어째서 복싱을 계속하는지 묻는 기자에게 남긴 회장의 답변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회장은 복싱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요. 우리는 그걸 ()가 된다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 기분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케이코가 가닿고자 하는 경지가 어떠한 곳인지는 감도 잡을 수 없다. 허나, 케이코가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 걸음이 미약할지라도 방향만 놓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사는 누군가에게 케이코의 기량(器量)이 하나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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