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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리뷰 : 전복(顚覆)된 세상에서 평등을 외친다 한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5. 3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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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전복(顚覆)된 세상에서 평등을 외친다 한들

 

 

슬픔의 삼각형 벗어날 수 없는 위계

 

평등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무게가 없다니, 서글프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끊임없이 인물의 말과 행동을 빌려 평등을 외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조차 머무르지 못하고 분자 단위로 쪼개져 허공으로 사라진다. 총 세 편(1. 칼과 야야 / 2. 크루즈 / 3. )으로 구성된 영화는 이야기를 담아낸 배경과 설정은 상이하나 결국 계급에 대한 모순과 위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주제를 관통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인류애적 가치는 영화 안에서 무참히도 짓밟힌다. 권력을 잡은 집단이 온갖 교양과 격식으로 치장하고 누리는 호사와 혜택은 그들의 아래에 눌려있는 또 다른 집단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배 집단이 차별에 차자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피지배 집단을 부려먹어 대는 작금의 행태에 대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슬픔의 삼각형>을 통해 기가 찰 만큼 우습고 냉기가 느껴질 만큼 날카롭게 꼬집는다.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위계의 근원적인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인지 고찰하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가 감정(슬픔)이 깃든 도형(삼각형)을 제목으로 내세운 까닭은 어쩌면 인간 군상 속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위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칼과 야야 –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데, 돈이 문제가 맞아

 

(해리스 티킨슨)과 야야(찰비 딘)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름답고 잘 어울리는 연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딘가 모르게 뒤틀려 있다. 우선 여성인 야야가 남성인 칼보다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불편하다.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으나, 영화가 알려주는 모델 업계의 사정(남성 모델이 여성 모델보다 수입이 3배 정도 적고, 온갖 성희롱에 노출되어 있는 등)을 보고 있노라면 칼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화려한 패션쇼에서 갤러리들의 환호를 받으며 워킹을 뽐내는 야야와 1열에서 밀려나 구석진 자리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칼이 대비된 장면은 두 사람 중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쇼를 마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나눈 칼과 야야.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영수증을 초조한 듯 바라보는 칼과 그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화장을 고치는 야야. 이윽고 두 사람은 누가 밥값을 낼 것인지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평등한 관계를 바라는 칼의 요구는 앞에서 그 본래의 의도가 희석된다. 몇 번이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칼을 보며 실소를 참지 못하는 야야의 시선은 점점 관객의 시선과 겹쳐간다. 그리고 씁쓸하지만 칼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차리게 된다.

 

크루즈 – 자본주의, 그 역겨운 호화로움에 대하여

 

영화는 크루즈 선상으로 무대를 옮겨 계급의 층위를 보다 견고하고 폭넓게 표현한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집단과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근무하는 승무원 집단, 그리고 갑판과 실내를 청소하는 집단. 상위 계층의 화려한 휴가를 위해 쉴 틈 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는 계층은 보이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숨을 죽이고 있다. 크루즈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장면은 부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추악하고 저열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그중 가장 압권은 선장(우디 해럴슨)이 주최하는 저녁 만찬의 대소동 장면이다. 연회장 밖은 거센 풍랑이 휘몰아치고 그 여파로 배는 매섭게도 흔들리고 있다. 그 와중에 만찬에 참여한 이들은 메스꺼움을 참아내며 고급 코스 요리를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그러다가 누군가 거친 요동을 견뎌내지 못해 구토를 하자 연회에 참석한 하나둘씩 토사물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고상함을 뽐내며 식사를 즐기던 그들이 온갖 오물들로 뒤덮인 배 안을 나뒹구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토록 역겨운 호화로움이라니, 차마 눈 뜨고 보기가 괴로울 따름이다. 자본의 우위를 점한 집단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행한 비정한 편법과 부패한 행각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낸 우화는 한동안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섬 – 생존 앞에 무너진 위계, 그러나 다시 세워지는 피라미드

 

위태로이 흔들리던 크루즈가 고요해진 것도 잠시, 해적의 공격에 배는 침몰한다. 난파된 크루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어느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린다. 흔들리는 크루즈에서의 혼란처럼 무인도에서 벌어진 계급의 전복은 너무도 급작스럽게 벌어진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층위의 변화에 적응해 간다. ‘생존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고립된 섬에서 사냥을 하고 요리를 할 줄 아는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자연스럽게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한다. 사냥한 먹잇감을 배분하는 그녀의 손길에는 인정과 배려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능력(혹은 쓸모)에 따른 차등을 매기는 매정함만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크루즈에서는 최하위 계급이던 애비게일 최상위 지배자로 올라서는 과정이 생각만큼 통쾌하지 않다. 계층의 벽이 허물어진 난 자리를 또 다른 계급의 벽으로 메꾸는 것에 신선한 감동을 느끼기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이란 본디 서열을 따지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일까. 한 번쯤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가치를 진실로 믿어보고 싶지만, 인간의 나약하고 비열한 속성을 마주하며 평등의 가능성을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야와 애비게일의 산행 끝에 발견한 문명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서 야야의 제안과 애비게일의 주저함을 목도하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건 헛된 욕심인 걸까.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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