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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고학> 리뷰 : 지나간 사랑이 남기고 간 무언가로부터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4. 2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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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고학>

지나간 사랑이 남기고 간 무언가로부터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

 

어느 고등학교의 한 교실, 진로특강을 수강하는 학생들 앞에서 영실(옥자연)이 알려주는 고고학(考古學)의 정의는 참으로 우아하다. 고고학의 본질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고고학에 대해 말하는 영실의 자태 때문인지 단언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렇지만 고고학이 추구하는 탐색의 방향이 영화 <사랑의 고고학>이 비추는 영실의 8년과 닮아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는 영실의 현재(학교 외부강사로 활동하며 탐사 프로젝트를 기다리고 있는)를 기점에 두고 인식(기윤)과 마주친 순간으로 거슬러올라 과거의 영실이 지금까지 엮어온 관계를 되짚어본다.. 영실의 시간을 함께 따라가며 현재라는 시공간에 마주하는 상황이 과거의 맺어진 만남과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라는 당연함을 흘려보내지 않고 찬찬히 살펴보는 고고학의 정갈한 정신에 서서히 매료되어 간다. 그녀가 사랑의 이름으로 지나 보낸 지난 8년이 꽃봉오리와 열매와 같은 시간이었을지, 삶의 그림자와 상실로 짙어가는 시간이었을지 영실의 지금과 과거를 비교하며 유추하는 묘미가 있다. 그리고 복기된 기억을 바탕으로 영실에게 다가오는 미래가 어떤 형태가 되어갈지 기대하는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영실과 인식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사랑의 고고학>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 중 가장 영화적이다. 발굴터에 앉아 현장 스케치를 하고 있는 영실의 곁으로 음악 작업차 서울에서 내려온 인식이 다가온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중하는 영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려는 인식의 수줍은 미소에서 그가 영실에게 매료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진입금지 테이프의 기능이 무색하게 인식은 그 선을 넘어 영실에게 다가간다. 영실은 인식의 접근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처음이라는 어색함에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영실과 인식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고 불릴만한 감정이 돋아나고 있음은 확신할 수 있다. 인식에게 초대받은 (전시회에 가까운)연찬회에서 인식이 작업한 음악이 흐르는 전시관으로 들어선 영실에게서 설렘이 묻어난다. 음악에 몸을 맡기듯 전시관에 비치된 소파에 잠들 듯 모로 누운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포근함에 파묻힌 안락감이 느껴진다. 갑작스러운 인식과의 만남이지만,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영실의 내면으로부터 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실은 인식과의 사랑을 시작하고부터 생기를 잃어간다. 인식은 영실의 과거에 얽매여 그녀를 힐난하고 조종하려 한다. 그리고 굳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쓰면서 영실의 태도 때문에 자신이 상처받고 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영실의 마음은 인식의 불신과 비난에 나날이 긁혀가고 있다. 감정을 잃어가는 영실의 표정에서 인식과의 관계가 무거워지고 있음이 절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실은 인식과의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다. 영실의 감내를 사랑하기로 약속한 상대를 위한 헌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랑이라고 생각한 이 관계가 사랑이 아닐수도 있다는 불안함을 외면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 관계를 시작하는 도중에 상대가 나를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 의심이 엄습하는 순간이 있다. 이는 대부분 상대의 무관심과 배려하지 않음에서 시작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을 복기해보아도 인식이 영실을 배려하는 순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서울역에서부터 인식의 연습실까지에서의 영실을 대하는 인식의 행동을 보면 분노가 솟구친다. 인식은 영실의 짐 가방을 한 번도 대신 들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택시를 타고 연습실 건물에 도착했을 때, 차 안에 남아있는 영실을 신경쓰지도 않고 묵묵히 건물로 들어가는 인식을 보며 마음이 식는다. 영실이 기사에게 정중하게 트렁크 좀 열어달고 말할 때,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처롭던지 영실이 그 길로 곧장 인식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인식과의 만남과 이별이 켜켜이 쌓인 7년은 현재 영실의 삶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식을 끊어내지 못한 채 헤어진 후에도 그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영실이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와 직언에도 무반응하던 영실이지만, 인식에게 새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게된 순간부터 그녀의 일상에 큰 요동이 들이친다. 충격은 배신과 절망(어쩌면 후련함까지)으로 증폭되어 한동안 영실의 일상에서 울렁거린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잠잠해진다. 오랜 기간 이별을 유예하면서 영실은 진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요함 가운데 영실은 최후의 배려를 담아 인식에게 마지막 통화로 이별을 고한다. 지층의 경계를 두고 긴 시간의 격차를 가늠하듯 영실의 이별은 관계의 경계가 되어 그녀의 사랑에 질감의 차이를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 인식과의 이별로부터 1년을 지나보낸 영실에게는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새로운 보금자리, 새로운 도전 그리고 새로운 사랑. 시작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영실을 둘러싼 영글지 못한 풋풋함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종잡을 수 없다. 허나, 지나간 사랑으로부터 남겨진 관계의 유물을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였을 영실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새 시작은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건강하리라 믿어보고 싶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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