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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리뷰 :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2. 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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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발코니 난간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캘럼(폴 메스칼)의 모습, 마음이 조금만 삐끗해도 바닥으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한 그 모습이 어린 소피(프랭키 코리오)가 아빠를 바라보는 느낌이었을까. 영화를 시작하는 11살의 기억, 아빠와 단둘이서 설레는 여행 중인 소피는 11살이고 곧 31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아빠의 11살은 어땠는지 묻는다. 좀 전까지도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즐거워 보이던 캘럼은 소피의 질문에 일순간 목소리부터 어두워진다. 아빠의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자신의 마음에만 녹화해 두겠다는 소피에게 20년 전 아팠던 기억을 털어놓는 캘럼의 모습이 화면 꺼진 회색빛 TV 브라운관을 통해 반사되어 보인다. 생일 축하 대신 엄마에게 귀를 잡혀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가 드러나는 캘럼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는 그렇게 캘럼의 실루엣을, 그것도 불안정한 앵글을 통해 보여준다.

 

소피에게 더없이 사랑스럽고 다정한 캘럼은, 사실 딸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비해 스스로가 단단하게 성장한 아빠는 아니다. 아내와 이혼 후 고향을 떠나 런던 근교에 정착하려고 하나 일도 사랑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힘겨운 몸부림을 이어가고 있음이 소피와의 대화 속에서 묻어난다. 그런 그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 시간을 딸과 단둘이서 보낼 수 있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어쩌면 소피가 가졌을 그것보다 더 컸으리라. 아빠로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을 그는 큰 침대를 양보하고 기꺼이 좁은 엑스트라 베드에서 잠을 잔다. 소피에게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진지하게 호신술을 가르치고, 일정한 시간에 맞춰 애프터썬을 꼬박꼬박 챙겨 바른다. 그날 찍었던 캠코더 영상을 돌려보느라 새벽이 다 되어 잠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소소한 모습들에서 이 여행에 대한 아빠 캘럼의 진심이 잘 배어난다.

 

그럼에도 캘럼은 종종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에 온통 사로잡힌 나머지 검은 파도 속으로 대책 없이 뛰어들어 버리기도 한다. 여느 아빠라도 평생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느끼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인 딸 앞에서 나약한 모습만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짐과 달리 현실의 캘럼은 자기 자신의 삶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미숙하고, 이미 여성으로 성장한 딸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턱없이 미흡하다. 그러한 아빠의 마음을 말 없이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듯한 11살 소피의 모습은 대조적으로 마치 엄마나 누이라도 되는 듯 의젓하고 품이 넓다. 폭풍과도 같았던 밤을 보낸 것을 계기로 캘럼의 마음은 오히려 가벼이 내려앉는다. 이제는 소피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보호하려는 태도가 아닌, 단지 선험자로서 그저 딸이 겪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곁에 있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같은 장소에 있지 않더라도 아빠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다던 딸 소피는 어느덧 그 때의 아빠 나이가 되어 아빠가 망설임 끝에 구입했던 그 카펫 위에 발을 딛고 20년 전의 여행을 추억한다. 딸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뒷모습을 좇던 아빠의 시선이 캠코더의 기록을 넘어 그 애틋한 마음까지 성인이 된 소피의 가슴 속으로 다가온다. 소피는 비록 딸에게 내리쬐는 태양광을 막아줄 수는 없어도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진정시켜주는 애프터썬과 같은 존재라도 되고자 했던 아빠의 사랑을 느끼며, 힘겨운 삶 속에 홀로 외로이 분투하는 아빠를 20년 전 여행에서 그랬듯이 꼭 안아준다. 헤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언제 어디서든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리라는 마음을 담은 둘의 눈빛이 스크린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가득 채운다. 그리고, 다시 치열한 삶의 전쟁터로 향해 돌아섰던 캘럼의 그 뒷모습을 이제는 소피가 바라본다.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기에, 상대를 이해하고 있음을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기에 영화를 보는 수많은 관객들의 갖가지 사연들을 모두 담아내고, 그 많은 가슴 속에 공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힘이다. 절제된 대사, 섬세한 표정의 변화, 카메라 앵글로 표현하는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 변화 등 영화의 어떤 요소도 과하거나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치밀하게 활용한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세상의 모든 아빠와 딸은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로버트 먼치의 명저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아들의 사랑 이야기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그 감동이 전혀 옅어지지 않는 것처럼, 녹록하지 않은 각자의 현실에 힘겨워하면서도 서로 곁에 있어 주고 이해해주고 싶었던 아빠와 딸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영화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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