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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베프> 리뷰 :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2. 1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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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베프>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요

 

장만옥의 입에서 나오는 이 대사가 영화 <이마 베프>의 모든 순간을 관통한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비달(장 피에르 레오)은 세월의 흐름에 그가 지닌 명성이 빛바래 가고 있다. 어느 날, 고전 무성 뱀파이어 영화 <이마 베프>의 리메이크를 제안받은 르네는 아시아 배우 장만옥(장만옥)을 캐스팅하는 조건으로 영화 작업을 수락한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장만옥은 르네의 집에서 앞으로 만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르네는 장만옥과 함께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동방삼협>을 시청하며 작품 속 장만옥의 연기와 무술 실력을 칭찬한다. 르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는 장만옥이라는 피사체를 통해 모작(模作)이 지닌 필연적인 한계를 돌파하려는 듯 보인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완벽한 작품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모순에 가까운 부담감을, 르네는 장만옥이 뿜어내는 모던함을 통해 넘어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르네의 포부는 장만옥의 외모와 자태를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장만옥은 르네의 조금은 과도한 찬미와 구애를 흘려듣지 않는 모양이다. 온 정신을 다해 경청하는 장만옥의 눈빛에서 그녀 역시 르네만큼이나 영화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영화를 만들려는 이와 영화가 되려는 이가 합심하여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부터 완성물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마 베프>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영화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표현하려 한다. 르네는 영화를 통해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르네가 예찬하던 무성 흑백 영화의 우아함에 대하여 장만옥이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하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촬영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르네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장만옥은 그녀에게 무용과도 같은 과장된 몸짓과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의상이 주어져도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맡겨진 배역에 심취한 탓인지 장만옥의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하게 그려진다. 실제 장만옥이 본인을 연기함으로써 나타나는 혼란스러움과 함께 전후 관계를 종잡을 수 없는 영화의 전개는 관객의 입장에서 저 상황이 꿈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자면, 장만옥이 다른 여성 출연자의 숙소에 잠입하여 장신구를 훔치는 장면을 말할 수 있겠다. 장만옥이 영화 의상인 타이트한 검은색 가죽 슈트를 입은 채 어두운 호텔의 안팎을 은밀하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이어 수면제를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장만옥이 나타날 때, 장신구를 훔치던 그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 실제인지 아닌지 엄청난 내적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마 베프>는 예술론적 영화의 가치와 더불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현장의 소리를 꽤나 비중 있게 다룬다. 영화는 영화사의 분주한 풍경으로 시작되는데, 그 안을 이루는 영화 관계자들은 대개 짜증과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모습은 촬영 현장에서도 이어져 감정싸움과 비난 그리고 촬영중단까지 도달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들의 갈등이 영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장 프로듀서와 의상 담당자는 영화 현장에서의 경력을 운운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쁘고 제작자는 촬영 일자를 맞추는 데에만 혈안이다. 그들의 예민함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 수 있으나, 문제는 본인들이 만드는 영화에 신뢰가 없다는 것에 있다. 르네와 장만옥을 제외한 나머지는 타성에 젖은 채 그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르네의 진지한 연기 디렉팅을 앞에 두고 냉소를 머금는 배우들을 보며 르네의 고독을 염려하게 된다. 또한 르네의 작품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프랑스 영화 기자에 반박하여 영화의 다양성과 예술성의 존중을 설파하는 장만옥의 모습은 생경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촬영장 안팎의 불안과 위기는 당연한 수순처럼 르네와 장만옥을 영화 작업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든다. 씁쓸한 결말 뒤로 시사회에서 선보이는 르네의 편집본은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하다. 엄청난 굉음과 파열음과 어우러진 흑백 화면을 가득 채운 장만옥. 그녀의 묵직한 걸음과 함께 눈에서 내뿜는 광선에 이어 스크래치와 조악한 무늬로 일렁이는 화면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였던 촬영본과 동일한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엔딩을 장식한 르네의 작품은 놀라움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르네가 말한 우아함과 모던함이 어우러진 영화적 아름다움이 이런 모양새일 줄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결국, 규칙과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움을 찾고자 했던 어느 감독의 처절한 고뇌와 번민, 그리고 그의 고민을 감당해 낸 어느 배우의 열연이 파격적인 영화적 세계를 표출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현실의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영화는 계속되어야 함을 몸소 증명한 두 예술가에게 박수로 존경을 표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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