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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리뷰 : 우리의 만남이 구원이었음을 세상에 증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3. 1. 3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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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우리의 만남이 구원이었음을 세상에 증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유랑의 달>은 세상이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린다. 소아성애자의 소녀 유괴 사건으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당시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가해자와 피해자로 알려진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알고 보니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 준 사이였다,라는 줄거리만으로도 솔직히 구미가 당긴다. 도대체 세상이 규정한 사실 너머에 어떤 진실이 숨겨진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훌라걸스><분노>의 이상일 감독과 <기생충>의 홍경표 촬영감독 그리고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두 배우 히로세 스즈와 마츠자카 토리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작품이라니,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조합이다. <유랑의 달>은 나기라 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원작 소설은 출간 1년 만에 37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고 일본 서점 대상 1위에 오르는 등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베스트셀러이다. 감독 이상일은 언론 인터뷰에서 주인공들의 관계가 너무도 풍요롭고 신선했다. 이상적이라고도 느껴졌는데 과연 그런 관계가 존재하는지 궁금하면서도 부디 실재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사회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으스러지거나 일그러지지 않는 순수함을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고자 했던 소회를 밝혔다.

 

사건의 진상(眞相)은 누구의 시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모양새와 질감이 달라진다. 마치 물체를 비추는 빛의 각도의 변화로 나타나는 암영(暗影)과 잔영(殘影)으로 만들어낸 예술작품을 보듯이 관찰자는 물체의 본질보다는 제 눈에 비친 표면의 형태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다수의 관찰자가 바라본 각도에서 도출한 하나의 의견은 사실이 되어 물체의 본질을 감싸 안아 버리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 영화가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 관객은 어린 사라사(시라토리 타마키)와 후미(마츠자카 토리)의 시작을 마주한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홀로 벤치에 앉아 독서를 하는 사라사. 그녀가 읽고 있는 책 위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진다. 사라사는 책을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등을 구부린 채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라사의 마음이 그녀의 행동에서 느껴진다. 거세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는 여린 소녀의 머리 위로 노란 우산이 다가와 비를 막아준다. 노란 우산의 주인은 바로 후미다. 우산 아래에서 마주 보고 있는 사라사와 후미가 앞으로 특별한 사이가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이어진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다리를 건넌다. 사라사 쪽으로 기운 우산에 후미는 몸의 반쪽은 비를 맞는다. 사라사와 후미는 그렇게 후미의 집으로 향한다.

 

시간은 흘러 후미와 사라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소아성애자의 유괴 사건으로 기억된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리 잡은 중학생 무리가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영상에서 후미를 애타게 외치는 어린 사라사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 앞으로 어른이 된 사라사(히로세 스즈)가 노련하게 손님 응대를 하며 음식을 나르고 있다. 사라사는 사건의 피해자로 불려진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긴다. 이러한 시선 앞에서 사라사는 늘 웃음 짓고 있다. 오랜 세월 훈련된 미소는 어색하진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인다. 애인 료(요코하마 류세이)와의 관계에서도 사라사는 료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려 한다. 료의 간섭과 통제도 사라사는 애정의 한 표현이라 여기고 있다. 하여 현재 시점과 교차되어 등장하는 (후미와 함께 한) 어린 사라사의 발랄하고 엉뚱한 그리고 생기 넘치는 모습들에서 지금의 사라사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어스름한 저녁, 앤티크 샵 2층에 자리한 카페 Calico의 주인이 읊조리듯 내뱉는 인사에서 사라사는 후미를 느낀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는 손과 스쳐 지나가는 옆얼굴에서 후미를 확인한다. 그림자로 그려진 그림으로 물질의 속성을 판단하고 매도한 사회의 거칠고 서늘한 환대 속에 본모습을 숨겨온 사라사는 후미와의 재회를 기점으로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자각하고 회귀한다.

 

사라사와 후미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순간마다 카메라는 초점의 이동과 클로즈업으로 관객의 시선이 오롯이 인물에 향하도록 유도한다. 카페 Calico에서 사라사의 표정 변화가 섬세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카메라의 의도에 따라 인물의 얼굴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배우는 눈썹의 움직임, 동공의 이동, 입 언저리의 떨림 등 안면에 자리한 온갖 근육과 기관을 사용하여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감정을 얼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더불어 아웃포커싱과 인포커싱 기법을 연달아 사용하여 화면 앞에 선 인물의 표정과 그 뒤에 자리한 인물의 행동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중요시 관찰하게 만든다.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그네를 타는 사라사와 그 뒤로 조그맣게 보이는 벤치 위의 후미, 카페 Calico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라사와 그 뒤로 커피를 내리는 후미. 같은 공간상임에도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 있는 듯한 착각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마주하고서야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에 쓰인 유랑(流浪)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비로소 정착(定着)을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비슷한 따뜻한 감각이 밀려오는 건 영화 안에서 표정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인물의 감정에 동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랑의 달>은 유괴와 소아성애를 미화하며 표현했다는 논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감독 이상일은 이러한 논란을 당사자성에서 벗어난 사회의 통상적인 시선으로 묶어둔 채 사라사와 후미 사이에서 피어난 감정의 밀도과 관계의 깊이를 그리는 데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 감독의 과감하고 담대한 결정 덕분인지 필자에게 있어 이 영화는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히나 사라사를 연기한 배우 히로세 스즈의 열연이 돋보인다. 료가 후미의 현재 삶을 인터넷에 퍼트린 장본인임을 알아차렸을 때 경멸과 슬픔으로 뒤섞인 사라사의 표정은 실로 압권이었다. 떨리는 입 근육과 눈동자의 흔들림에서 사라사의 절망이 화면을 뚫고 나와서는 필자의 가슴 깊숙한 곳에 파고들었던 순간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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