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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 리뷰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2. 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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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잠시 간의 정적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차들이 달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온 사방을 뒤덮는다. 그렇기에 <희수>는 소음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작품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말소리도, 배경음악도 거의 없고 오롯이 한 사람만을 좇아 흘러가는 러닝타임으로 이루어진 <희수>는 소리 없이 말을 건넨다.

 

주인공 희수(공민정)는 말이 없고 소극적이며 유약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을 염색공단의 공장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중퇴 후 그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일터에서 산재를 당한 희수는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 본디 연인 학선과 함께 떠나려 했지만 그는 승진을 위해 여행을 미루자 말하고, 둘은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같이 여행을 가지 못한다. 혼자 남은 희수는 온통 산뿐인 내륙을 넘어 바다가 보이는 묵호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영화 속 희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마다 왜인지 모를 미련과 우울함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여타 영화처럼 인물의 내면을 짐작게 할 사건도, 장면도, 내레이션도 없다. 그저 간간이 보이는 희수의 미세한 표정 변화로 그의 희로애락을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다.

 

영화는 온통 의문투성이다. 왜 희수는 여행을 간다고 했으면서 폐쇄된 무인 역사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일하고 있는 공장을 두고 횟집에서 또 일을 하는 걸까? 영화 내내 걷고 또 걷는 희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 <희수>는 그렇기에 관객이 하여금 여백의 이야기를 채우길 바라는 것만 같다. 그의 여정 곳곳에 비어있는 공간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희수의 밑바닥 감정까지 내비치는 느낌을 준다. 이는 채 여물지 못한 나이부터 오랜 시간 공장에서 일한 희수의 마음은 채워질 틈 없이 바쁘게 흘러갔던 게 아닐까 작게나마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를 집중하여 제대로 봤다면 감독이 작품 곳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다. 희수는 영화 첫 부분에서 합성섬유 장막 속으로 점검을 위해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다. 이후 안전 사이렌이 울리는 장면이나 공장에서의 모습이 더는 등장하지 않는 점,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염불을 외는 효과음을 미루어 보았을 때 희수의 산재가 단순히 사고가 아닌 것 같다고 느끼게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면 이후 희수의 여행과 학선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다 더 잘 이해된다.

 

묵호에서 일할 때 만난 중년 여성이 희수에게 무성 통곡을 읽어주는 장면이나 어느 라이브 클럽에서 만난 소년이 희수를 자전거에 태워주는 장면은 앞서 언급한 일들을 유추하지 못했다면 뜬금없는 장면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학선은 이 모든 씬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데 희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좇아가지만 그는 희수를 만나지 못한다. 희수가 들렀던 집에서도, 영화 내내 희수가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도 학선은 희수를 옷 끝자락조차 볼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버스 정류장에서 학선이 희수와 동명이인인 어린 소녀 '희수'를 만난 장면이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희수의 행적을 쫓아보지만 결국 닿을 수 없었던 학선의 모습은 대사 한 마디 없었음에도 왠지 모를 먹먹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희수는 나무에서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땅에 묻는다. 먹먹한 기차 소리와 극 중 몇 번 들리지 않았던 어둡고도 오묘한 배경음악이 들린다. 동백꽃을 다 묻은 희수는 기차가 사라짐과 동시에 모습을 감춘다. 그가 마지막에 지었던 표정은 우는 얼굴일까, 아니면 웃는 얼굴일까. <희수>는 고요하기에 완벽한 작품이다. 외롭고 쓸쓸한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관객들에게 조용히 먹먹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시와 같은 영화였다.

 

-관객 리뷰단 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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