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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리뷰 : 푸른 빛의 화양연화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2. 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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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푸른 빛의 화양연화

 

이 영화의 성패는 여성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갖은 억압을 이겨내고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얼마나 개성 있는 시각과 언어로 구현하느냐, 과연 여성들의 연대가 공감과 울림을 줄 수 있냐에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 나나(해피 살마)가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격동기에 이어진 여성의 굴곡진 삶을 살아내는 모습은 인도네시아적 한()이라 표현할 수 있는 정서로 다가오며 그 고통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남성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참화가 여성에게 가족의 상실과 같은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만들고 개인적으로도 배우자의 외도라는 고통까지 더해지며 극복해 내기 어려운 마음의 흉터를 남기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나나의 아픔에 관객이 동화되는 것이다. 특히, 나나 내면에 남겨진 트라우마가 꿈의 형식으로 재현되는데, 그의 심리적 고통의 무게가 몽환적이면서도 인도네시아적 분위기를 머금고 연출되는 장면들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나나의 아픔을 깊이 있게 잘 전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태도는 여성을 마치 남성에 부속된 존재처럼 취급하는 동양적 구태의연한 시각을 결연히 끊어내는 것에 있다. 감독은 남자들에 의해 벌어진 다툼과 대결의 희생자가 되어왔던 여성들이 이제는 외부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나나는 남편의 내연녀인 이노(라우라 바수키)가 자신이 누운 남편의 반대쪽에 누워 당돌하게 마주보는 꿈을 꾸는데, 남편이 자신 쪽으로 돌아눕는 것에 안도하거나 기뻐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불쾌한 꿈을 꾸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이노라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도 막지 않는다. 더불어 그가 마음으로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연대의 손을 마주잡는다. 여자의 행과 불행이 남자에게 종속된 것처럼 여기는 시각, 남자의 외도가 마치 아내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듯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노의 존재와 태도는 더욱 멋스럽다. 이노는 푸줏간 주인이다. 남자라 하더라도 거친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유일한 푸줏간 주인이 바로 여성 이노다. 그는 직업만큼이나 언행에 거침이 없고 솔직하며 당당하다. 어떤 시대,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푸줏간 주인이 천대받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그러나 그의 태도는 푸줏간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내고 묘한 매력과 강인함을 뿜어내는데, 그에 더해 경제적으로도 제법 큰 힘을 갖고 있다는 점까지 인상적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자기 주도적 성향이 드러난다. 불륜이라는 시각 따위는 아랑곳않는 듯 내연남의 아내에게 고기를 선물로 보내고 그 집을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하지만 이노 역시 남자를 독차지하려고 악다구니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입은 나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게다가 나나가 받아왔던 부당한 대우와 심적 고통을 마치 자신의 일인 듯 공감하며 그가 주위의 차별과 자격지심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연대의 손을 내민다.

 

영화는 이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다투고 반목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응원하고 연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특히, 나나가 이노의 도움을 받아 긴 세월 자신을 얽매던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독립된 개체로서,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과 남자에게 구속된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나나가 현 남편의 지속되는 외도에 눈 감고 자신의 진심을 억누른다면,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늘 과거에 머물며 부유(浮遊)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나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불확실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전 남편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나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시작점이며, 앞으로의 삶이 그의 인생에 푸른 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될 것이다. 왕가위 감독이 소려진(장만옥)에게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던 그 붉은 빛의 사랑을 짙은 청색으로 변주하며...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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