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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리뷰 : 내 편이라는 착각 – 이해를 바랐고 사랑을 원했던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1. 2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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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내 편이라는 착각 이해를 바랐고 사랑을 원했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니, 제목에서 풍겨오는 기운부터가 심상치 않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감히 상상하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김세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은 모녀라는 관계성으로부터 불거지는 갈등이 극단으로 몰리는 과정을 첨예하고 농밀한 시각으로 조명한다. 또한 세상이 규정한 모성(母性)이라는 틀에 관해 대담한 비틀기를 시전하고 있다. 막이 오르고 첫 장면에서부터 감독의 과감한 시도가 드러난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이정(임지호)은 묵묵하게 세면대에서 속옷을 빨고 있다. 화장실 문 바깥에서 수경(양말복)은 큰소리로 통화를 하며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다 입고 있던 팬티를 이정을 향해 던지는 수경, 화려한 무늬의 팬티는 속옷을 빨고 있던 이정의 손등으로 떨어진다. 이정이 고개를 돌려 수경을 바라보지만, 수경은 이정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듯 다급하게 손짓을 한다. 이에 이정은 그녀가 빨고 있던 속옷 중 또 다른 화려한 무늬의 속옷을 수경에게 건넨다. 수경은 이정을 마치 시종을 부리듯 하대하고, 이정은 묵묵히 수경의 천대를 받아낸다. 이런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니,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첫 장면에서 시작된 충격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 가장 경악스러운 장면을 꼽자면, 아무래도 수경이 이정을 차로 들이박는 장면이다. 수경은 차의 결함으로 벌어진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이정은 수경이 일부러 자신을 차로 친 것이라 말한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정은 (생리통 때문에 부탁한 타이레놀을 사 오지 않은 것을 포함하여) 수경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수경은 조수석에 앉아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는 이정에게 분노하며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다. 이정은 수경의 폭력에서 벗어나 차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고, 그런 이정을 보며 수경을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이정을 향해 돌진한 듯 보인다. 사건의 진상이 어떠하던 이정과 수경은 결국 원고인과 피고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선다. 차 수리 전문가의 소견과 어린 시절 이정이 수경에게 쓴 편지 등 명백한 증거들이 수경의 죄를 입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상에서 재판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기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매몰차게 법정을 나서는 수경의 뒤태를 보며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이정과 수경은 이후의 장면에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에게 독을 토해내듯 온갖 악담과 비난이 오간다. 만성적인 문제로 보이는 두 사람의 갈등으로부터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케 한다. 이정은 끊임없이 수경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심지어 한 번만 사과해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한다. 이정의 삶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의 편지에서처럼) 수경의 무심함과 무자비한 폭행으로 얼룩져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친의 구타와 폭언 그리고 졸업식과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행사를 챙겨주지 않는 모친의 무정함은 이정을 유약하고 불안한 존재로 성장시켰다. 하여 이정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수경에게 사과를 받고자 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이정이 그동안 쌓아온 설움과 분노를 무마할 수는 없겠으나, 그 한마디의 말이 전하는 마음의 온기로 이정은 잠시나마 위로받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경은 끝끝내 사과하지 않는다. 뜬금없이 사과해달라 매달리는 이정에게 젖을 더 먹을는지 묻는다. 수경은 억척스럽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이정이 야속하다. 밖에서 겪는 온갖 수모를 어루만져주지는 못할망정, 원망만 해대는 딸을 이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 함께 있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이정과 수경은 밖에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경은 종열(양홍주)과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꿈꾼다. 이정은 회사 동료 소희(정보람)의 원룸에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두 사람의 희망은 그리 오래지 않아 신기루임이 드러난다. 종열은 그의 딸 소라(권정은)를 버려두고 수경과의 미래를 그릴 수 없고, 소희는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이정에게 나날이 불쾌함을 드러낸다. 겨우 찾은 줄 알았던 보금자리에서 내쳐진 이정과 수경이 돌아갈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벗어나고파 했던 그들의 아파트이다. 정전된 집에 들어온 이정은 어두운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던 나신(裸身)의 수경과 마주한다. 수경을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주는 이정과 그 불빛 아래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수경 사이에 약간의 애정이 묻어 나온다. 이는 그녀들이 밖에서 느낀 냉엄한 현실과의 상대적인 질감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은 두 사람 사이에 끓어오르던 분노를 가라앉힌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소소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중, 이정은 수경에게 묻는다.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어두운 화면에 윤곽만이 드러난 수경은 정면을 응시할 뿐, 입을 벌리지 않는다.

 

정전된 밤이 지나 동이 텄을 때, 수경은 이정이 진정 집을 벗어났음을 알아차린다. 이어진 장면에서 이정은 속옷 가게에 있다. 치수가 제각각인 속옷을 골라온 이정에게 점원은 이정의 치수를 묻고, 이정은 그제야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측정해본다. 돌이켜 보니, 영화에서 이정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붉은빛을 띠고 있다. 붉은색 경차와 수경 그리고 속옷이 위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정이 고집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붉은색의 이들은 순차적으로 이정의 곁을 벗어난다. 수경이 자신을 들이박았던(것으로 추정되는) 붉은색 경차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폐차가 되고, 영화 중반까지 붉은색 머리를 고수하던 수경은 새치염색으로 검은색 머리가 된다. 그리고 속옷. 영화의 첫 장면에서 생리혈이 묻어 나온 팬티와 뒤섞여 함께 세탁된 여러 벌의 속옷들은 오랜 기간 이정과 수경이 공유하였다. 속옷 가게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엄마(수경)의 사이즈에 맞춰 입어온 속옷에서 벗어나게 될 이정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이다. 비록 수경의 사랑을 확인했는지 못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이정을 느낄 수 있다. 이정의 전진으로 수경 또한 다시 일어서기를 조심스레 기원해 본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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