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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리뷰 : 때론 공든 탑이 무너질 필요가 있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1. 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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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때론 공든 탑이 무너질 필요가 있다

 

홍상수의 신작 <>은 사랑은 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함께하고 싶지만 혼자가 편한, 그런 공허함과 무료함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단독 건물 속에 자리 잡은 5개의 층에서 벌어지는 어느 중년 남성의 이야기에는 흥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고민을 넘어선 삶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알맹이가 꽉 들어찬 듯 단단해 보이던 그의 현재는 어느새 안이 텅 비어 있는 듯한 헛헛함으로 다가온다. 생기가 넘치는 듯 보이던 대화가 억지로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할 만큼 시들해지고, 기품이 흘러 보이던 인물들에게서 예민과 짜증으로 범벅된 치졸함이 배어난다. 한 인간이 지닌 다채로운 감정의 울렁임과 그에 비해 한없이 단조로운 갈등과 고민이 맞이한 결말을 통해 감독 홍상수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저마다의 해답을 찾아 에피소드를 쌓아 올리는 것이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아무래도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건물 그 자체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해옥(이혜영)이 병수(권해효)와 그의 딸 정수(박미소)에게 자랑하며 소개하는 건물의 각층에는 그 공간을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짤막하게 드러난다. 2층에서 예약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 3층에 사는 젊은 부부, 4층에 기거하는 어느 예술가까지. 2층부터 4층까지의 인물들은 해옥의 입을 통해 묘사될 뿐 처음부터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병수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층층이 쌓아 올릴 때 순차적으로 병수의 에피소드가 되어 영화의 현실에 나타난다. 해옥의 안내는 결국 <>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의 예고편처럼 기능한다. 그녀의 소개를 계기로 영화는 관객에게 병수가 어떤 새로운 인물들과 만나게 될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이에 더해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병수가 어떠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것인가에 대해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해옥의 건물 1층에서 시작된 식사는 지하로 내려가 와인을 마시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인테리어를 배우고자 평소 왕래하지 않던 병수에게 연락한 정수, 유명한 감독인 병수에게 끝없는 호감을 내비치지만 그의 딸에게 선뜻 취직자리를 내어주기에는 불편한 해옥. 아슬아슬한 웃음이 이어지던 중 갑작스러운 병수의 외출로 정수와 해옥만이 자리에 남게 된다. 어색하고 차가운 공기에 오금이 저릴 것 같던 두 사람 사이에 병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열기를 더한다. 정수는 겉과 속이 다른 자신의 부친을 신랄하게도 비난한다. 밖에서는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그에 걸맞은 품격을 드러내는 사람일지 몰라도 가정에서의 병수는 가족들을 외롭고 슬프게 만든 장본인이다. 해옥은 정수가 내뱉은 병수에 대한 악평을 반박한다. 사람은 모두 안과 밖의 행동이 다르다는 것, 안팎에서 서로 다른 병수의 모습 전부가 병수라는 한 인간이 가진 모습이라는 것. 해옥의 말은 병수를 대신하여 토로하는 변명처럼 들린다. 마치 병수의 잘못은 잘 모르겠지만, 달라도 괜찮고 변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이 느껴진다. 무조건적인 편애가 불편하기도 하지만 해옥의 대사가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져 설명하기 어려운 위안을 받는다.

 

2층에서 병수와 선희(송선미)는 사랑에 빠진다. 늘어가는 와인 병과 오고 가는 눈빛들로부터 두 사람이 점차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감지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물밀 듯 밀려오는 순간, 그 찰나의 정적에 함께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두렵지 않느냐는 병수의 가벼움을 가장한 질문에 선희는 자기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무섭다고 말한다. 엉뚱해 보이는 선희의 답변으로부터 사랑에 빠지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어쩌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해석에 도달한다. 이윽고 이야기의 무대는 3층으로 옮겨 함께 살고 있는 병수와 선희의 모습을 담는다. 마주 앉은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 여전히 애정이 흐르지만, 보증금과 가게 매출 등과 같은 현실의 문제 앞에서 얼굴을 붉힌다. 심지어 3층 이곳저곳에 비가 새고 있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몰라 누수 지점 아래에 그릇을 두고 불안에 떨지만, 건물주인 해옥은 수리를 차일피일 미룬다. 고치려면 건물을 다 뜯어내야 한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반박하며 다른 전문가를 부르겠다며 말이다. 뻔히 보이는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3층의 내부가 사랑과 현실 앞에 선 병수와 닮아 보이는 건 분명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침대에 홀로 누워 잠꼬대를 하듯 사색에 잠긴 3층의 병수에 이어 곧장 4층에 기거하는 병수가 등장한다. 4층의 병수는 이전의 병수와는 사뭇 다르다. 그의 곁에는 선희가 아닌 지영(조윤희)이 있고,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던 3층의 병수와 반대로 4층의 병수는 건강을 위해 열심히도 고기를 섭취한다. 다만, 3층의 누수처럼 4층에는 하수구 악취라는 공간의 문제가 병수를 여전히 괴롭힌다. 해옥은 한결같이 건물을 뜯어내기를 꺼리며 수리를 은근히 거부한다. 병든 공간이 치유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병수는 지상으로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간다. 매우 이상하게도 병수는 건물 앞에서 자신의 차에 몸을 싣고는 곧장 차에서 내리는데, 이 장면 다음으로 시점은 병수가 정수와 함께 처음 해옥의 건물을 찾아간 지점으로 이동한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병수와 와인을 사러 밖으로 나온 정수가 마주친 장면을 앞에 두고 갑작스러운 시간의 역행이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란 이렇게 병들어가는 탑을 오르고 내리는 과정을 순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깨닫는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병수의 전신에 맞춰 포커스를 조정한다. 화면에 딱 맞춰 가운데 서 있는 병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건물()로 느껴진다. 온갖 문제들을 껴안고 위태위태하게 버티는 그 인생이 한숨의 담배 연기에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을까?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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