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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라스의 여름> 리뷰 : 그럼에도 영원히 함께 할 여름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1. 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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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라스의 여름>

그럼에도 영원히 함께 할 여름

 

너무나 당연해서 단 한 번도 지속 여부를 생각조차 않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전쟁통에 피뇰 가족의 목숨을 살려준 솔레 가문과 그에 대한 보답으로 농장의 경작권을 주었던 피뇰 가문에게는 아마도 문서 같은 것은 필요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거래의 차원이 아닌 보은과 믿음 그 이상의) 계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모 세대가 세상을 떠난 지금, 두 가문 간에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문서로 입증이 필요한 법적 권리 뿐이다. 부모들의 사연이 담긴 무화과에 진심을 담아 정성스레 건네 본들 땅과 농장이 솔레 가족에게 갖는 의미가 피뇰가의 돈을 향한 가치 기준에 변화를 가져올 리 만무하다.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두 가문의 관계만이 아니다. 솔레 가족 주변의 많은 농장들이 대대로 이어온 복숭아 농사로는 먹고 사는 일조차 해결하기 어려워져 하나둘 땅을 팔아넘기고 있다. 솔레 가족 내부적으로도 악화되는 수입 때문에 일꾼을 적게 고용하고 그 자리를 여자와 아이들이 채우게 된다. 좀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농장을 등지며 이탈하는 사람까지 생기니 돈독했던 가족에게도 붕괴의 조짐이 생겨난다. 특히 솔레 가족의 농장을 대표하는 키메트(조르디 푸홀 돌체트)가 몸 여기저기 통증으로 시달리는 모습은, 녹슬고 잦은 고장을 일으키는 그의 농기계와 더불어 더 이상 지속이 불가능해 보이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던 키메트 남매 관계의 균열은 현실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코앞까지 다가온 시대변화의 파고를 더는 막아설 수 없다고 느끼는 누이들과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에 부치면서도 무조건 부정하려는 키메트의 부질없는 고집은 결국 남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어차피 소유권도 없는 농장에 돈은 안 되고 온 가족이 고되기만 한 일에 억지를 부리는 일의 한계는 너무나 명백하다. 사실, 키메트도 그의 아들 로제르(알베르트 보쉬)에게는 농장일 말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길 누누이 강조한다. 그나마 딸 마리오나(세니아 로제트)는 농장일 자체를 싫어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피뇰에게 농장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복숭아 농사를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만 하다.

 

결국 농장의 계약 문서를 찾지 못하면서 솔레 가족의 여름을 마무리하는 복숭아 병조림 담그기는 이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모두 모인 아이들은 다시 어울려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뛰어놀고, 모든 어른들도 왁자지껄하게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솔레 가족의 모습에 안도하려는 순간, 요란한 기계음이 그들의 평화를 깨뜨린다. 영화 시작 장면에서 아이들이 가장 아끼는 고장 난 자동차를 냉정하게 끌고 갔던 포크레인이 이번엔 복숭아나무를 무참히 깔아뭉갠다. 아이들의 놀이터, 어른들의 삶을 지탱해왔던 터전, 솔레 가족의 여름마다 풍성한 행복을 가져오던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솔레 가족이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하든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함께 해온 행복한 여름이 그들 마음속에는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카를라 시몬의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봤다면 자연히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전작은 인위적으로 감정을 짜내지 않고도 그저 프리다(라이아 아르티가스)의 어린 시선을 따라가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맞닥뜨리는 따뜻하고 뭉클한 감정이 긴 여운을 남긴다.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도 감독은 특유의 캐스팅 능력과 사실감 넘치는 연출력으로 여느 시골마을 대가족의 모습을 마치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따스한 감성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그러나 영화의 그 따뜻함 속에서도 안일한 갈등 봉합과 그에 따른 해피엔딩으로 흐르지 않고, 농촌과 가족을 해체하는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와 신재생에너지의 이면에 드리운 부정적인 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음으로써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이제 그의 체험에 기반한 3연작 중에 마지막 영화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올지 자못 기대하게 된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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