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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의 노래 | 정태춘·박은옥 초청

CINE TALK 씨네 토크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0. 2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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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의 노래, 정태춘> 씨네토크

/2022.06.05

임진모 음악평론가 진행

고영재 감독, 정태춘, 박은옥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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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 : 안녕하세요. 아까 무슨 매진이라고 했죠? 풀매진. 이런 GV 저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많이 와주셔서 제가 대신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마 보시면서 정태춘 박은옥의 음악 세계를 모르는 분도 굉장히 찡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학생 때부터 음악과 살아왔거든요. 제가 대학 입학할 때 [시인의 마을]이 나왔습니다. 물론 77년 겨울에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78년에 크게 히트했거든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한테 가장 결정적인 건 <북한강에서>. 거기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소울이라는 아주 낯선 것. (일동 웃음) 그때부터 어, 이 사람? 원래부터 이상했지만 더 이상해져 가는구나. 제 표현이 너무 거친가요, 선생님?

 

정태춘 : 아뇨, 괜찮아요. (웃음)

 

임진모 : 그리고 또 이제 우리 삶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게 <, 대한민국> 하고 <92년 장마, 종로에서>거든요. 그 거친,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삶을 살아오신 두 분의 삶. 그 삶을 다시 한 번 경배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그 전에 제가 여기에 앉아서 영화 볼 시간이 없어가지고요. 그래서 오늘 그냥, 꼭 봐야겠다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봤어요. 우리 고영재 감독님에게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저런 다큐를 만들었을까. 왜냐면 굉장히 무지막지한 다큐입니다, 이게. 세상에 그렇게 제가, 많은 아티스트, 뮤지션 다큐멘터리를 봤지만 노래 전곡을 다 살리는 건 처음 봤어요. (일동 웃음) 그것도 한 곡이 아니라 지금 몇 곡을 살렸는지 아이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일곱, 여섯곡 정도를 그냥 통째로 살렸던데요. 근데 다른 아티스트들 같은 경우는 조금 지루해요. 근데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고 아마 여기 오신 선생님들도 거의 그렇지 않으셨어요? (관객: ~) 저는 그랬을 거라고 봐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요즘 정태춘 박은옥의 음악 세계에서 진짜 중요한 거, 음악평론가로서 말씀드려보면요. 사실은 삶에 천착해서 시대를 응시라고 그런 건 진짜 다시 되새길 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근데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봐야 되는 건, 오늘 가사를 쭉 들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처음 알았어요. 이 혼탁한 세상으로부터의 고민이 또 있지만, 우리 정태춘 박은옥 님께서는 음악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음악을 쓰고 악보를 만들 때 보면 어느 정도 합의된 규칙이 있어요. 그것을 때로는 뮤지션은 고수할 수밖에 없어요. 왜 고수해야 하냐면, 안 그러면, 사람들이 잘 못들으니까. 근데 이 두 분은 본인이 하는 말, 생각, 분노, 좌절. 때로는 위로 이런 것들을 자기 언어로 그냥 써요. 쓰고 거기에 음악이 따라오게 해놨어요. , 너무 어려운 말인가. (박수) 진짜 정태춘의 말과 생각 그리고 토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고요. 그렇게 만들어주신 고영재 감독님에게 깊은 감사 말씀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박수) 40주년 때, 2019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저랑 같이 만났던 거 기억하세요?

 

정태춘 : .

 

임진모 : 기억하신다니 너무 보상받은 기분입니다.

 

정태춘 : 그때 전시회가 있었죠. 40주년 기념해서. 예술인들이 기념전을 열어주셔서 50여 명이 참여했고, 양쪽에 제 붓글씨 작품들만 한 30점을 올렸었고요. 그리고 거기 토크 프로그램에 임 선생님이 와주셔서 같이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40주년 기념해서 50여 명의 지인, 관계자들이 정태춘론이랄까 책이 나왔는데 거기에 특집 요청을 해주셨고. 임 선생님이 방송할 때 게스트로 나가기도 했었고 그랬었죠.

 

임진모 : 그날 제가 아주 용감하게 물어본 게 있어요. 근데 그게 영화에 나왔어요. 안 나올까 생각했는데, 역시 정태춘 선생님은 저의 마음을 이 영화에 표현해주셨더라고요. 이건 제 생각이에요, 그냥. 그 손녀한테 까칠하게라고. (일동 웃음) 그때 제가 뭐라고 전해 들었냐면 이렇게 들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왜 이렇게 까칠하세요?” 기억나시죠. 오늘 다시 한 번 질문드리겠습니다.

 

정태춘 : 기억은 안 나는데. 까칠하죠. 까칠합니다. 가족으로서의 까칠함이 있고요. 또 사회에서 내 행적을, 내 작품들을 보면서 표현하는 까칠함이 있을 것이고. 가족 관련된 얘기는 오늘은 하지 말고. (일동 웃음) 작품으로서 작품자로서 얘기를 한다면 세상하고 친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이 가자. 편안하게 세상에 돌아가는 걸로 편안하게 같이 가면 칠할 일이 없죠.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 드니까 관계가 좋지 않고, 관계가 좋지 않으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표현되는 모든 내용이 까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뭐 그렇습니다.

 

임진모 : 근데 그게 우리 70년대, 80년대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필요했나 봐요. 제가 <북한강에서>라는 곡을 들었을 때, 그때 제가 굉장히 연애에 빠졌었거든요. 저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춘천 강릉을 오면서 북한강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엄청난 매력을 느꼈어요. 강가에 강가에, 안개가 천천히 걷혀가고. 어우 진짜. 그 느낌은, 아직도 마음속에 강렬히 남아있어요. 우리 선생님들은 느끼셨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 시대를 살아서 78<시인의 마을>을 듣는 순간, ? 분명히 포크인데 너무 다른 거예요. 그 이전에 송창식 포크, 이정선 포크, 다 들었어요. 근데 이 포크는 뭔가 이상한 포크인 거에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 확 드는 거예요. 방랑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방랑자거든요. 그래서 집을 아직도 안 사려 그래요. 방랑자인데, 그 방랑자의 모습을 때론 분노로 때론 따스하게 안아주는 그런 노래였어요. 1집 뒷면이 흑백이었는데 거기에, 두 번째 B면의 첫 곡이 <목포의 노래>에요. 그때 그 용어를 쉽게 말할지 내 기억엔 그래요. 그랬어요. 아까 영화에서 <촛불> 영상 나왔잖아요. 그 시대 가수는 못 들었어. 신인가수상이에요. 저 그거 봤어요. 저렇게 촌스러운 줄 몰랐어요. 아무튼 <북한강에서> 의 느낌을 영화에서 너무 잘 표현했고. 전 정태춘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들으면 들을수록 강과 바다가 너무 많이 나와요. 강과 바다는 이별의 현장이거든요. 쓰라린 이별을 경험한 사람. 좌절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아요. 강과 바다. 근데 이 강과 바다는 또한, 2의 다짐의 공간이에요.

 

정태춘 : 그렇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끝이죠, . 가고 있는 것의 끝. 그리고 또 한편으로 건너편에 대한 동경 이런 것들도 있죠. 제 노래에 물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보면, 여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 끝에서 좀 헤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너머에 대한 동경이 있고. 아까 제 가사 중에, 뉘앙스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북한강에서>도 강물을 가면서, 북한강. 북한강이라는 어감이 또 좀 다릅니다. 그래서 굳이 제목을 북한강에서말고 다른 제목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툭 던져서 그것이 듣는 사람을 보면 그 제목을 보는 사람한테 느껴지는 어떤 느낌 그런 것들도 사실은 다 계산을 좀 하죠. 그것도 약간 이제 까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임진모 : 근데 까칠한 사람치고는, 성공한 게 하나 있으시잖아요. 뭐 히트곡보다 항상 거의 오른쪽에 박은옥 선생님이 계시니. 물론 박은옥 선생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즐거워 하지않는 느낌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요.

 

정태춘 : 아내한테 까칠한 게 제일 큰 약점이고 안 좋은 부분이죠.

 

박은옥 : 성공했다는 표현도 정태춘 씨가 동의 안 할 겁니다.

 

임진모: 근데 진짜로, 이건 사적인 질문인데 어떻게 이분하고 오래 사셨어요?

 

박은옥 : 저도 가끔 저한테 묻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답이라면 답이랄까. 이 영화를 다른 토크 자리에서도 말씀을 드렸는데 영화를 굉장히 여러 번 봤어요. 처음에 1차 편집한 거를 보고, 그다음에 2차 편집한 걸로. 작년에 영화제 세 군데에 초대되어서 상영되었으니까, 그 영화제에 각기 가서 극장에서 보고. 물론 정태춘 씨는 안 봤어요. 저만 봤고요. 그다음에 3월에 마지막 편집이 다 끝났다고 고영재 감독이 파일을 보내줘서 집에서 보고. 이후에 밤중에 혼자 정태춘 씨 자는 시간에 여러 번 봤어요. 보면서 내가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그랑블루>나 다른 영화도 한 세 번 정도 보고 그 이상은 보지 않았는데 왜 이 영화는 이렇게 많이 볼까. 우리 영화라서 그럴까. 근데 우리 영화라고 하기에 정태춘 씨의 작은 부분도 들어가 있고. , 여기 정태춘 노래가 있어서. 내가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러 가는구나. 영화를 통해서.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40여 년을 정태춘하고 살아온 것도 음악이 있어서 가능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수)

 

임진모 : 두 분 같이 서서 노래할 때 박은옥 선생님의 표정이 편한 적이 없었어요. 앞으로는 조금 더, 조금 더 많이 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은옥 : 근데 저는, 공연 때는 사실 정태춘 아내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서요. 그땐 엄연하게 저 박은옥이라는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서 올라가기 때문에, 아마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았다고 느끼셨다면 저 자체가 항상 공연할 때, 정태춘 씨 노래 부를 때, <떠나가는 배> 기타 반주를 할 때나 <시인의 마을> 기타 반주를 할 때도 제가 음악에 빠져있거나 그래서일 거예요. 그리고 또 뭐, 무대에서 정태춘 씨 노래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할 노래는 아니라서.

 

임진모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죽음>이에요. 첫 음반. 물론 이제 불법 음반. 나중에 들었지만 정말 그 노래가 갖는 사실주의와 그런 게 바로 정태춘의 삶과 예술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 잠깐 감독님한테 마이크를 드리겠습니다. 영화를 만들었을 때. 가장 주안점이랄까? 이게 포인트다. 이게 이 영화, 배우 두 사람의 어떤 포인트다. 하신 게 있었을 거 같아요.

 

고영재 : 정태춘 노래죠. 그게 정태춘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이고요. 두 번째는 박은옥의 보컬이죠. 그게 박은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임진모 : 복권? 나는 복권이라고 들었어요. (웃음)

 

고영재 : 죄송합니다, 제가 발음이.

 

임진모 : 아니 근데, 복권도 괜찮은데? 권리 복권도 있고 로또도 한 번 맞아야 되죠.

 

고영재 : 제가 요즘에 영화 때문에 바빠가지고. 예전에는 꼭 한 번씩은 로또를 샀는데. 3주 동안 못 샀어요. (웃음) 박은옥 님의 보컬이 박은옥 님의 캐릭터를 가장 잘 살리는 길이라고 봤고요. 정태춘 님의 노래가 빠진 말로서의 정태춘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온전히 관객들이 느끼실 수 있게끔, 해보자. 이게 나름대로 제가 가장 주안점으로 두었던 부분이고 아울러서 정태춘 박은옥을 평가하는 말들을 가급적 줄이자. 관객한테 뭔가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정도 지점을 계속해서 고려하면서 그렇게 나온 거 같아요.

 

임진모 : 지금 감독님의 말씀에 보러 오신 선생님들이 대부분 동의하실 것 같아요. <우리들의 죽음>,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그렇고, <정동진>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노래를 다 살려주는데, 영화를 갖다 하나의 콘서트로 만들어준 게 아닌가. 아까 박수 굉장히 많이 치셨죠. 앞에서 막 몇 분 치시던데 저분이 진정한 콘서트 관객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콘서트처럼 만들었어요. 그죠? 자 이제 오신 선생님들한테 마이크를 제가 많이 드리고 싶어요. 왜냐면 궁금하실 테니까. 그래서 많이 질문을 해주셨으면 좋겠고, 우리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도 여기 오신 아주 소중한 관객. 오늘 제일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선생님들이 여기에 위로를 줬지만 이분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박은옥 : . 그래서 추앙합니다. (환호)

 

임진모 : 오늘 단 하나의 노래라도 챙겨 가셨으면 그게 진정한 승리가 아닌가. 그게 행복이 아닐까 싶고요. 우리 선생님한테 미리 질문 받기 전에, 몇 가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건 이제 약간 농담성인데 박은옥 선생님하고 결혼한다 그럴 때 우리들의 연인을 빼앗아가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때 사실은 그때 박은옥 선생님이 정태춘의 이름보다 더 컸다니까요. 진짜예요. 그때 당시에, 우리 남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청순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결혼을 한대요. 그래서 이런 난리가 있나. 그래서 아까도 말씀해 주셨지만은, 정말 제가 대신 질문을 드렸는데. 박은옥 선생님의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태춘 : . . (일동 웃음) 아니, 결혼한 사람한테, 40몇 년을 산 사람한테. 그런 질문은 좀 이상하지.. (일동 웃음)

 

임진모 : 그게 아니라, 사람은 진심으로 원합니다. 진짜. 잠깐 그때 당시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이에게>는 이미 같이 만든 거라고 설명해 주셨고. 오늘은 ‘3’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었더라고요.

 

정태춘 : 저희는 레코드 회사에서 사장님 소개로 잘 만났고요. 저는 이미 앨범 녹음이 다 끝나 있었고 조그만 홍보 앨범이 배포가 된 상태였고. 정식 앨범이 아마 안 나왔을 때인 것 같은데 그때 박은옥 씨가 저희 회사로 왔어요. 부산에서 활동을 하다가 처음 만났는데, 좀 이렇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인상뿐만이 아니고 특히 노래에서. 거기서 <제시>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놀랐죠. 세상에 저런 노래가 있어? 또 저런 걸 부르는 사람이 있네. 그리고 저 노래를 저렇게 기타를 가지고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있네. 내가 알던 미국의 팝가수들 하고는 전혀 다른. 미국의 포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 했지만, 그것이 일단은 음악적으로 굉장히 충격적이었었고요. 그리고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냥 끌렸죠. 그냥 끌렸고, 그리고 <필연> 같은 거 쓸 때도 그렇고. 연애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서 연애하나요. 앨범 작업 들어가면서 노래 연습 같이 하고...

 

임진모 : 어쨌든 그래도 두 분에게 있어서 매개체는 음악이 일정 부분 더 큰 부분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거라고 저는 보는데요. 박은옥 선생님한테 듣고 싶어요. 박은옥이 보는 남편이자 음악가인 정태춘 음악 역사상 이 곡, 이 곡, 이 곡이 중요하다. 우리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를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하실 수 있다면.

 

박은옥 : 정태춘 씨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제. 느끼는 건데요. 아까 임 선생님도 얘기하셨지만 정태춘 노래에서 노랫말, 가사를 빼면은... (가사의) 거의 70~80%가 그 노래에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저는 들을 때마다 감탄을 해요. 40여 년이 됐지만은. 저는 정태춘 씨가 만든 노래를 또는 쓰는 편지들, 일상적인 카톡 문자 등. 그런 걸 보면서 늘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굳이 저한테 어떤 노래를 뽑아달라고 하신다면은, 안 알려진 노래 중에서 <한여름 밤>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게 이제, 우리의 젊은 20, 남편과 아내, 그리고 변하는 우리 삶의 모습이 담겨 있고. 저는 결혼을 일찍 했거든요. 저희 때는 그게 결혼 적령기였는데. 스물일곱 살, 스물네 살 때 결혼 했어요. 그래서 그때 애들을 낳고 사는 게 이제 공고할 때. 제가 아기하고 잠이 들어있고, 한여름 밤에 아마 번개 치고 했던 밤이었나 봐요. 그날 밤의 그림을, 풍경을 담은 노래인데, 저는 그 노래를 듣고 가사를 보면 저의 옛날 그 모습들이 보이니까. 그 노래를 참 좋아하고. <떠나가는 배>는 누구나 좋아하시고. 저는 사실 지금, 발표된 지 거의 30년이 넘은 것 같은데 지금도 옆에서 반주를 하면 늘 처음 들을 때처럼 그 느낌으로 가고요. <시인의 마을>은 영화 속에서도 나왔지만, 사실 정태춘이라는 사람을 직접 보기 전에 노래를 먼저 들었고요. 그리고 그 노래가 임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가사였기 때문에, 굉장히 충격이었죠. 물론 그때, 산울림의 <아니 벌써> 라는 노래가 나와서 그 노래도 굉장히 자유로운 가사와 색다른 음악으로 충격이었는데. 정태춘 씨의 <시인의 마을>을 제가 어느 음악다방에서 듣고, 자세를 다시 고쳐가면서, 집중해서 들었던 만큼 굉장히 궁금했었고. 마침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사실 노래를 다 지나서, 몇 년 지나서 또 들어보면 또 새롭고. 역시 이 사람 정말 뛰어난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임진모 : 일찍이 대박을 치고 거의 100만 장 이상 판매가 이루어졌다고 제가 들었어요. 그때 당시.

 

박은옥 : 저희는 판매되는 숫자는 모르죠. 왜냐하면 저희는 다 전속이어서. 그리고 판매되는 거에 따라서 지금처럼 인세가 지급되는 시스템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저희가 정말 첫 회사를 좋은 회사 사장님을 만나서 그래도 그 <촛불>이 엄청나게 히트를 해서 집 아파트를 하나 살 만한 돈을 주셨는데 저희가 철이 없어서 거기 수유에 전세로 들어갔어요. (일동 웃음) 그 돈을 까먹었지요.

 

임진모 : 저는 그때 당시에 이제 음악을 추적하던 때라서 일찍이 이렇게 흥행에 성공을 했는데 그다음에 이제 너무 부담을 가진 게 아닌가. 너무 좋았는데 대중적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이때 굉장히 아티스트로서 어떤 작품을 해야 될까, 굉장히 고민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정태춘 음악 세계에서 참 저는 중요한 모먼트라고 생각합니다.

 

정태춘 : <시인의 마을> <촛불> 들어있는 1집을 녹음을 하고, 가수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어떤 가수가 되겠다 하는 게 없었어요. 어떻게 활동을 하겠다, 또 어떤 선배 가수들이 있는데 나는 어떤 스타일로 활동을 하겠다든지. 그쪽 가요시장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러니까 앨범을 발표하면 방송국에서 튼다. 그럼 가수는 어떻게 활동을 하지. 방송 출연? 또 뭐가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죠. 그래서 <시인의 마을>에 자존심을 걸었는데 막 뚝뚝뚝 잘려가지고. 깨작깨작 해가지고. 부분 부분 지적을 받는데, 그때 레코드에서 사장님이 다 고쳤습니다. 그때 레코드 회사 사장님이 그걸 다 고쳤습니다. 그 레코드 회사가 출판사 도서 출판을 하는 회사였어요. 그래서 분위기가 좀 다르죠. 사장님이 그 가사를 손을 대실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사장님이 그 가사를 다 고쳐가지고 심의를 넣어서 통과가 됐죠. 대표적으로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이렇게 바뀌어서 이제 통과가 됐단 말입니다. 여러 군데가 이제 그런 식으로 고쳐져서. 그런데 저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당국에서 그렇게 하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내가 작가인지, 가수인지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나는 그냥 군대에서 재대해 가지고 박은옥 씨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하고도 연애도 하지 않고, 어디에도 메이지 않은 가장 행복한 자유인이었어요. 근데 물론 연애하면 상황이 달라지죠. 그래서 1집은 그렇게 해서 회사 사장님하고 골라서 앨범을 냈는데, 그게 그냥 우연히 히트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2, 3집에서는 또 내 생각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럼 이번엔 네가 골라봐. 네가 좋아하는 노래로 2집을 내봐. 그래서 제가 골랐죠. 이런 노래 저런 노래, 발표하고 싶습니다. 그래 작업을 해보자, 그래서 앨범을 냈죠. 그런데 아까 박은옥 씨가 얘기하기도 했지만 좋은 회사였다고 하는 게 그럴 때 사장님이 그 대중성을 가지고 검토하지 않았어요. 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서 그 2집이 나왔는데 참패를 했죠. 그럼 3집은 더 달라져야 되는데 3집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지고 앨범 반쪽을 국악기만 가지고 녹음을 했어요. 그때 민족주의적인 그런 경향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쪽은 거의 비슷한 노래들을 한쪽은 국악기 연주로 가고 한쪽은 양악도 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거는 앞에 참패한 것보다 더 참패를 했겠죠. 그러면서 이제 내가 해야 될 것은 가족의 생계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회사에서 인세도 끊기고 아기도 있고 그다음에 전망도 불확실하고. 노래들은 좀 있기는 있는데, 어디 가서 이걸 어떻게 발표하고 생활비를 좀 받아볼까? 그런 시기였죠. 그러면서 현실하고 부딪히는 시기였어요. 현실이 이렇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되는, 비로소 어른으로 넘어가는 그런 시기였죠.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저한테 중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저를 각성시킨, 사회적으로, 가장의 책임감으로서도 그런 중요한 시기였죠. 그게 20대 말, 30대 초반 경우. 그렇습니다.

 

임진모 : 그리고 이제 <북한강에서> 대중적으로 다시 돌아오셨죠. 그 곡은 정말 우리 젊은이들, 우리 시대 친구들한테 정말 폭발적인 반응이었어요.

 

정태춘 : 그랬을까요. 그렇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대중적이었다고.

 

임진모 : 결과적으로.

 

정태춘 : 결국 결과. 그런데 그 앨범들을 내놓고 물론 좋은 반응이 있었죠. 그렇지만 <촛불>, <시인의 마을>을 처음에 할 때의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래도록 누적이 되어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한 경우고. <촛불>, <시인의 마을> 같은 경우에는 그냥 나오자마자 확 이렇게 올라왔던 경우고.

 

임진모 : 그리고 이거, 박은옥 선생님한테 정말 묻고 싶은 건데. 사실 일반 가정으로 환원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아요. 왜냐면, 어쨌든 이 분의 음악은 단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세상과의 대화, 세상을 더 응시하고 하고 심지어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 그런 노선을 취하게 되면서, 검열철폐운동 할 때, 이때만큼은 남편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 없었다. 저는 제일 감동이었어요. 그때 집안을 지키는 분으로서, 그때의 소회를 좀 듣고 싶어요.

 

박은옥 :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무대가 바뀐 게 80년대 후반쯤인데요. 저는 그때 이제 딸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전에는 얘기노래마당 할 때만 해도 아이를 데리고 공연을 다녔거든요. 유치원을 다니기 전이기도 했고. 또 유치원을 다녔어도 유치원 빠지고 갈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제 초등학교는 6학년이니까, 학교를 빠질 수가 없으니까, 두 사람 중에 누군가는 아이를 전적으로 육아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고. 그러면 당연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나가서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 저는 이제 노래하는 걸 접고, 아이를 돌보고 했는데. 아마 아이가 초등학교 2, 3학년때부터 정태춘 씨가 노래 무대가 바뀌었고. 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무대에서, 전혀 노래를 못하는 채, 이런 상황이 저한테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정태춘이라는 사람이 어딜 가서 노래를 하는 걸까. 그리고 거기는 어떤 곳이, 왜 이 사람이 왜 계속해서 그 무대에 가서 노래를 하는 것일까를 알아야 되겠더라고요. 알지 못하면 우리 사이에 아무리 음악이 있어도 서로를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클 거 같고. 그래서 제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집회가 있는 곳에 가기 시작했죠. 가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거기를 참여해서 이 사람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또 노래 부르는 그 집회의 성격이랄까, 사람들을 보고 그러면서... 나쁜 일이었다면 제가 어느 자리에서도 얘기를 했는데요. 나쁜 일이었다면 제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렸을 거예요. 근데 전적으로 제가 말려서도 안 되고,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또 거기 함께하시는 분들을 보니까, 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였지만 저런 삶을 사시는 분들도 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면서 뭐 내가 도울 수 있으면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요. 사전검열 철폐운동을 할 때는 이게 창작자의 권리라고만 생각을 하시는데, 듣는 사람들의 선택권도 사전에 다 차단이 되는 거였거든요. 그랬는데, 이게 너무 오랫동안 몇십 년을 관행처럼 해왔더니 그걸 감히 누가, 계란으로 바위를 깰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거고, 또 그거에 대해서 크게... 아마 고치라 그러면 고치지, 하고 하셨을 분들도 계셨을 거고. 그래서 이 싸움에 대해서 잘 몰랐던 분들도 너무 많이 계셔서. 근데 이제 코앞에서 6년 동안 싸우는 걸 옆에서 보니까, 이 사람 혼자의 일이 아닌데 사실은. 그래서 그때 너무 외로워 보였고, 너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그때 많이 했었죠. 다른 거는 사실 같이 연대하는 분들이 계시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많은 세대들도 있었는데, 그 사전검열 철폐만큼은. . 그래서 제가 사실 이번에 제가 영화 개봉하고 나서 26년 만에, 그게 96년도에 없어져 버려요. 26년 만에 제가 두 분께 감사 인사를 드렸어요. 한 번은 제주 시사회 가서 강산에 씨에게 20년 만에 정태춘 씨를 대신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기자회견장에 대중음악 예술인이었고, 정태춘 씨는 또 다른 분도 오셨다고 했는데, 저는 기억이 없고요. 전주 가서 개그맨 전일성 선생님이 <대한민국> 불법 음반 나왔을 때 카세트테이프를 사비를 털어서 몇십 개씩 나서 후배들에게 나눠줬다고. 그래서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임진모 : 제가 이 말씀 드린 이유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해서 질문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여기 오신 선생님들. 궁금한 거 많으실 텐데 질문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용감하게.

 

관객1 : 안녕하세요, 두 분 너무 아름답게 나이 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감독님께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드실 생각을 하셨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고영재 : 글쎄요. 저도 정태춘 영화를 찍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다르게 생각해 보니까 첫 번째는 기획사 대표님이 있어요. 아마 그분이 40주년 기념 사업회를 크게 벌리셔서, 아마 그분의 그 열정과 주위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그런 것들을 외면할 수 없으셔서 제가 아니라 이분께서 찍어, 내려놓을게, 라고 했던 게 일차적이었던 것 같고요. 이차적인 부분은, 저는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이 절 섭외했던 것도 <우리 학교><워낭소리>를 제작했으니, 제작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고요. 제가 제작자로서 실패해 가지고, 좋은 감독님을 모셔와야 되는데, 제가 제작자로서 능력이 없어서, 좋은 감독을 못 모셔와서, 어쩔 수 없이 제가 하게 된 상황이었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 나왔는지는 여러분이 평가해 주셔야 되는데. 운때가 맞았던 거 같습니다. 제가 뭔가를 기획해서 인위적으로 했으면 못했을 것 같고요. 그런 기운들이나, 여러 것들이 좀 맞물리면서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입봉할지는 저도 잘 몰랐어요.

 

임진모 : 근데 제 생각에는, 저 선생님의 질문은 이거였어요. '어떻게 용감하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니?' 이런 영화인데 제가 좀 굉장히 까칠하기는 합니다. (일동 웃음)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게 저는 리얼하게 들렸습니다. 좋은 답변이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만족하세요?

 

관객2 : 정태춘 선생님께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계속 노래 가사를 쓰실 때, 지금 이후로 쓰시고자 하는 방향이 있으신지.

 

정태춘 : 어떻게 보면 노래를 만들 만큼 만들었다 하신 것 같아요. 사랑 노래도 있고, 지독한 폭설 같은 노래도 있고, 그런가 하면 내 내면을 드러내는 그런 노래들도 있었고. 다양한 노래를 많이 만들어서 이 정도면 충분히 작품자로서 다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고요. 그렇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굳이 끌어내야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작품들이 계속 나오는 건데. 중간에 끊었죠. 세상과 소통이 안 되는구나. 그러다가 한 7~8년 지나가지고 한 두어 달 박은옥의 앨범을 좀 만들어야 되겠어. 한 두어 달을 일고 여섯 개 쓰고. 그리고 앨범 만든 뒤에 다시 접었다가 이제 10년 가까이 됐습니다. 그리고 딴 일만 했죠. 그러다가 이제 올해 3월쯤 돼서 노래를 다시 만들기 시작을 했어요. 근데 이제 거기는 배경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밥 딜런에 관한 책을 한 3천여 페이지 읽었습니다. 밥 딜런의 가사가 총 수록된 가사, 평전, 자서전, 소설. 레너드 코헨의 평전도 보고, 비틀즈의 가사도 훑어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러기 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우리 한국 현대시라고 하는 평론집를 읽으면서 평론집을 쓴 영모 선생으로부터 글을 받았죠. 받아서 젊은 작가들 것도 소개받아서 읽기도 하고, 신동엽, 김수영 전집을 보고 있었고. 그때만 해도 노래 만들거라고 생각도 안 했죠. 시를 좀 써볼까. 이 얘기를 왜 이렇게 긴 얘기를 하고 있냐면, 지금 가장 중요한 화두가 그겁니다. 노래를 만드는 걸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제 두어 달 밖에 안 지났어요. 그러던 찰나에 레너드 코헨, 스팅, 핑크 플로이드 이런 음악 들으면서 나도 노래 만든다. 노래 만들고 싶어. 이렇게 된 거죠. 아무 이유도 따지지 말고 아무 목적의식 없이 노래를 만들고 싶어. 나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정말 좋은 노래. 그래서 노래를 쓰기 시작했죠. 새로운 소재가 나온 건 아니고, 그동안 내가 써온 단문들, 사진, 붓글로 답했던 그동안의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고 있습니다. 가사에서도 좀 더 시적이고, 문학적이고. 그래서 가사도 좀 더 튼튼하고 그러면서도 풍부한 뉘앙스가 담겨 있고. 그런 여러 욕심을 가지면서 가사를 쓰고 있지요. 그래서 100곡 쯤은 만들어야겠다 해서 숫자를 세 가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15곡 정도 나왔어요. 계속 다듬는 과정.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칠십 가까운 노인네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하는데. 매일 아침 이게 정말 좋은 노래일까? 내가 이 나이에 새로운 창작을 하는데, 이게 좋은 노래일까? 이 가사들이 시적으로 충분히 고양된 가사들일까? 그리고 가사 속에 풀려 나오는 이야기들이 누구하고 공감을 하자는 것일까. 이런 자기 독백입니다. 자기 과잉이 지나치지 않은가. 자기연민이 은연중에 깔려있지 않은가. 수많은 고민들을 해야 하는 거예요. 더 이상 교훈적인 이야기는 안 하지마는 과잉된 자의식, 과잉된 자기연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아치의 노래> 같은 노래만 해도 철저하게 자기연민에 빠진 노래인 거죠. 그런 것들이 비난 받지 않고 통용될 수 있었는데. <북한강에서> 같은 노래도 자기연민이 가득한 노래라 볼 수 있죠. 이런 혼란한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은데, 내 속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다 풀어놓고 싶은데, 그런 기준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는. 그래서 지금 창작에서 약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박수)

 

임진모 : 답변이 잘 충분히 잘 되셨는지. 굉장히 중요한 말씀하시는 거예요. 총체적인 고민의 상황인 거죠. 근데 제 생각에는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번 기대해 주세요. (관객 박수)

 

관객3 : 안녕하세요. 저는 정태춘 님께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아까 영화 중간에 5.18 그 노래 시작할 때 설움을 얘기하실 때 한 관객이 일어나서 나는 이제 그 이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오하고 나가는 장면도 있었잖아요. 그게 조금 인상 깊었는데, 그런 상황을 많이 겪으셨었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좀 궁금하네요.

 

정태춘 : 그렇게 직설적이고 큰 소리로 생각을 이야기하고 나를 야단을 치고 나온 분은 사실 처음이었습니다. 대개들 마음에 안 들면 슥 이렇게 나가시거나 아니면 계속 환불을 받아서. 콘서트 할 때 그런 분들이 더러 있었지만, 또 공연장에서 아주 정확하게 자기 의견을 내놓고 가는 거는 처음이었어요. 당황하기는 했죠. 그런데 전체 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왜 하필 여기 광주에서. 그런데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당신의 어떤 걸 보려고 왔는데 전혀 다르잖아, 그러니까 나갈래. 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 싫어. 하고 자기표현을 이렇게 한다는 게 나는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박은옥 : 근데 심지어 어떤 관객은 그것도 공연의 퍼포먼스인 줄 아셨대요.

 

고영재 : 심지어 저희는 관객 객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걸린 거예요.

 

정태춘 : 영화 촬영을 하는데 카메라 방향을 고정시켜 놓고. 여러 대가 있지만 다른 대에는 객석에 특별히 이렇게 객석을 조준하고 있는 카메라가 없었는데 그날만. 그 카메라에 그 장면이 잡힌 거죠.

 

임진모 : 제가 볼 땐 역사의 현장이에요.

 

정태춘 : 그러니까 제 노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의 한 일면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분들은 박수를 쳐 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가 하면 아주 거부감을 일으키는 또 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 그걸 보여준 거죠.

 

임진모 : 제가 잘 모르지만 아마 여기가 극장에 시간제한이 있을 거예요. 맞죠. 저도 궁금한 게 많고 선생님들 얘기도 정말 많이 듣고 싶은데, 제가 오늘 초반에 너무 떠들었어요. (일동 웃음) 거듭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오늘 너무나도 중요한 얘기, 삶의 우리 이정표가 될 만한 그런 얘기 많이 해주신 우리 정태춘 선생님, 박은옥 선생님 너무너무 존경합니다. 보면요. 너무 잘하세요. 음악도 잘하시고 전체적으로 이렇게 무대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말 큰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존경합니다. (일동 박수) 그리고 이 영화를 이렇게 잘 만들어주신 우리 고영재 감독님. (일동 박수) 처음 뵀는데 너무 지금 옆에서 좋은 공기를 저한테 제공해주고 계세요. 지금 끝났는데 딱 한 사람만 받겠습니다. 진짜 너무 잘못했네, 이거. 죄송합니다.

 

관객4 : 질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만 시간 어떠십니까. 그리고 이 질문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사실은 며칠 전에도 프로그램 알게 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저는 차에서 박은옥 선생님 부르신 <양단 몇 마름> 듣고서는 뭔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는데, 저는 곡을 찾아보면서 작사 작곡에 정태춘이라는 이름을 보고서는 부부인 줄 몰랐어요. 저는 하나의 의심도 없이 곡이고 가사고 다. . 근데 그 곡을 쓴 시기와 가사를 쓴 시기가 굉장히 젊은 시기라고 조금 전에 영화 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세 번째 놀랐는데요. 지금도 사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사의 정서가 고등학생 시절에 썼던 곡과 가사라는 게. 제 궁금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셨으면.

 

박은옥 : 재수생 시절에 썼거든요. (일동 웃음) 공연 때도 이 노래 부르기 전에 보충 설명을 늘 드리는데요. 정태춘 씨가 8남매예요. 8남매 중 7번째로 위로 누님이 계신데 그중에 둘째 누님이 굉장히 알뜰하신 분이세요. 그래서 정태춘 씨가 아마 재수 생활을 잠깐 할 동안 그 부평의 누님댁에 몇 달 머물러 있었다는데 그때 누나의 모습을 보고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서 저도 이 노래 처음에 받아 들고 깜짝 놀라서. 어떻게 열아홉, 스무 살에. 열아홉 살이었나요. 스무 살이었는지. 저는 정태춘 씨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니까 시기적으로 그때였는지 정태춘 씨가 기억력이. 영화도 한 달 지나면 새로운 영화가 되는 정태춘 씨.

 

정태춘 : 재수하던 때였어요. 바이올린으로 음대를 지원하려던 때였으니까 아마 72. 그전까지 트로트 쪽의 노래는 안 만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스타일이 나왔는지. 그리고 악보상으로는 남아있는 것 중에 가장 첫 번째 노래인데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왔는지. 그 당시에는 그 노래를 가지고 얼마나 씨름을 하면서 쥐어짜면서 노래가 완성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지나고 나보면 그냥 어디서 하나 툭 내어 봤는데. 다른 공간에서 빛이 나지 않겠는가. 지금도 새로운 노래들을 만들면서 아마 집중을 하고 이야기를 쥐어 짜낸다고 할 정도로 어떤 어휘들을 선택할 것인지, 이야기 전개는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가지고 아주 고민을 하는데 지나고 보면 그걸 또 어디에선가 내가 하나 집어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고 있죠.

 

박은옥 : 그거 어디에요. 저도 좀 집어오게. (일동 웃음)

 

임진모 : 지금 정태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정태춘이 쓴 게 아니라 어떤 이상한 음악이 홀연히 들어와서 그 곡을 쓰고 있다. 이게 뭐냐면 정태춘 선생님 이 용어를 자주 안 쓰는데 진정한 천재입니다. (일동 박수)

 

정태춘 : 지금 시간도 없다고 하는데, 내가 자꾸 이제 지금 이 얘기를 자꾸 하고 싶어 하는 거는 요즘 노래를 만들고 있고 그걸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됐는데 앞에 썼던 노래는 처음 만들었을 때는 완성도 안 되고. 이거 뭐 부실부실한 노래예요. 근데 한두 달 지나면서 가다듬고 하다 보니까 최근에는 박은옥 씨가 보고 부르라고 그것을 오선지로 만들어서 거기에 가사까지 붙여서 내놓으니까 이게 하나의 물건이 된 거예요. 이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노래였는데. 나중에 지나면 이게 또 어디서 이제 가져온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두 달간에 그걸 가지고 씨름했던 과정이 있어요. 집중하고 피곤하고 고치고, 고치고. 이렇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가요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임진모 : 여기 이 좋은 자리 함께 해주신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 고영재 감독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은옥 : 저 오늘 여기 오는데 기차로 왔거든요. 기차로 오는데 제 앉은 뒷자리에 보지는 못했는데 아기 웃음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어린 아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이 따뜻해지고 제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소리도 누군가한테 그런 소리였으면 좋겠다. 누군가한테 마음에 가닿아서 그 마음을 다독여주고 어루만져주고 그런 소리였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태춘 : 현실적인 이야기 할게요. 저는 우리 시장 문명을 혐오한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영화를, 그것이 상품이 됐습니다. 이제 그걸 가지고 시장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 관객분은 25천 명 정도 됐죠. 그런데 5만은 돼야 홍보사가 투자한 걸 갚을 수 있고, 그다음에 15만 명이 돼야 영화 제작비가 나오는데 아직 25천 명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영화사에서 감독님이 또 제작자이시기도 하고 독립영화를 해오셨으니까 감독님의 고군분투가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영화 시장에서 이 영화에게 허용한 스크린 그 스크린에서 만난 관객은 25천 명. 그리고 3만 명을 가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이 시장에서 한국의 음악 시장에서 나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 25천 명 중에 여러분들이 계시고 따뜻하게 환대를 해주시고 또 함께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고영재 : 저희 영화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독립예술영화들이 이 공간에서 많이 상영되고 있거든요. 꼭 자주 들르셔서 많이 봐주시고요. 한 번만 매진해주시지 말고요, 우리 영화도 한 세 번 더 매진해주시고요, 다른 영화도 한 달에 한 번은 매진시켜 주시는 훌륭한 관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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