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초록밤> 리뷰 : 초록의 밤이 지나가면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8. 11. 12:36

본문

<초록밤>

초록의 밤이 지나가면

 

초록은 예로부터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이란 곧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진 상태를 의미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며 생명력을 내뿜는 초록에서 싱그러움과 함께 때때로 음산한 기운을 느끼는 이유는 초록이 지닌 자연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초록밤>에는 죽음이 만연하다. 목이 매달려 죽은 고양이, 장례, 로드킬, 자살에 이르기까지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영화는 이러한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살아있는 자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초록빛 가로등이 주변의 나뭇잎들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을 꽉 채운 어둠 속에 빛나는 초록빛을 보고 있노라면, '셸레그린'의 우아한 색감과 '라듐'의 야광빛이 연상된다. 18~19세기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던 두 물질은 초록빛 외에 '침묵의 살인자'라는 별칭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셸레그린과 라듐이 내뿜는 초록빛에 매료된 사람들은 셸레그린 속 비소와 라듐이 방출하는 방사능에 노출되어 호흡곤란, 어지러움, 괴사 등 온갖 부작용을 앓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좇다가 죽음에 이르다니, 아이러니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이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 감도는 영화 안에서 원형(강길우)와 그의 아버지(이태훈)는 밤과 같은 사람들이다. 짙은 초록빛을 암흑 속으로 집어삼키는 가려내는 밤의 세계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배가시킨다. <초록밤>에서의 몇몇 장면은 원형과 아버지를 어두운 배경 안에 두고 그 주변을 밝게 비춤으로써 두 사람과 외부환경을 대비한다. 불이 꺼진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는 아버지와 밝은 대낮의 빛을 받으며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김민경)의 상대적 명암을 강조한 장면, 집안을 환히 밝히던 조명을 모두 끄고 어둠 속 소파에 걸터앉아 홀로 바깥으로부터의 초록빛을 내리쬐는 원형의 실루엣 등에서 두 사람이 지닌 밤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 원형과 아버지는 침묵으로 그들 내면에 잠식한 불안을 외면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고모들이 격하게 싸우는 장면에서 원형은 그들과 거리를 둔 자리에 멀뚱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아버지는 부친과 내연관계인 노년의 여인에게 당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달라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원형과 아버지가 차마 표출하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은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담배 연기와 뒤섞여 내뱉는 한숨으로 두 사람이 숨통을 틔우고 있는 듯 보인다.

 

원형의 어머니는 <초록밤>의 등장인물 중 가장 생기(生氣)를 내뿜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녀를 붉은색과 화려한 꽃무늬로 표현한다. 시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나들이를 위채 단장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울 앞에 앉아 붉은 립스틱을 맵시 있게 바르는 그녀에게서 슬픔과 괴로움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초록의 대척점에 있는 빨강으로 그녀를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영화의 전체에 깔려있는 죽음(초록)의 기운에 저항하여 살아내는 인간(빨강)을 그리고자 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빨강은 혈액(血液)을 연상시킨다. 피가 온몸을 순환함으로 생명이 유지되듯 그녀의 움직임을 덕분에 원형과 그의 부모는 가정을 유지한다. 침묵하고 외면하는 남편과 아들을 대신하여 시누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도, 시아버지의 정인(情人)애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녀의 타성에 젖은 책임감도 결국 폭발하고 만다. 시골집에서 돌아가는 길, 고요함을 깨는 충돌음. 차와 부딪힌 들개가 남기고 간 혈흔과 움푹 파인 차체 앞에서 그녀는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내뱉는다. 무성한 녹음(綠陰) 속에서 그녀는 방금 전 사고를 당한 들개와 마주 보고 있다. 온몸이 찣겨 피칠갑을 한 야생동물과 그녀의 붉은 재킷이 겹쳐 보인다. 상처받는 몸으로 꾸역꾸역 살아내기 위해 버티고 서 있는 두 생명이 서로를 보며 흘린 눈물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시골에서의 사건을 마무리하고 원형의 가족, 집에 도착한 그들은 차에서 내려 각자의 짐을 챙겨 한 명씩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세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눈맞춤도 없이 적막만이 흐른다. 그들 뒤에 우직하게 자리한 초목의 무리는 바람에 이끌려 살랑거린다. 현악의 연주에 맞춰 춤추듯 보이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에 왠지 모르게 스산하고 음울한 기운이 풍긴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죽음의 예감이 끝도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아파트 야간 순찰하던 원형의 아버지 앞에 가로봉에 걸린 밧줄이 보인다. 그는 교수대(絞首臺)에 올라선 사형수처럼 밧줄 고리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목에 줄을 매단 채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는 눈물을 흘린다. 관객을 향한 그의 눈에서 무력한 회한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밧줄 고리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초록의 밤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른다. 그렇게 다시 일상은 시작된다. 지난밤의 이야기는 묻어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작되는 하루가 축축하고 텁텁하게 다가온다.초록은 예로부터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이란 곧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진 상태를 의미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며 생명력을 내뿜는 초록에서 싱그러움과 함께 때때로 음산한 기운을 느끼는 이유는 초록이 지닌 자연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초록밤>에는 죽음이 만연하다. 목이 매달려 죽은 고양이, 장례, 로드킬, 자살에 이르기까지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영화는 이러한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살아있는 자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초록빛 가로등이 주변의 나뭇잎들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을 꽉 채운 어둠 속에 빛나는 초록빛을 보고 있노라면, '셸레 그린'의 우아한 색감과 '라듐'의 야광빛이 연상된다. 18~19세기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던 두 물질은 초록빛 외에 '침묵의 살인자'라는 별칭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셸레 그린과 라듐이 내뿜는 초록빛에 매료된 사람들은 셸레 그린 속 비소와 라듐이 방출하는 방사능에 노출되어 호흡곤란, 어지러움, 괴사 등 온갖 부작용을 앓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좇다가 죽음에 이르다니, 아이러니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이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 감도는 영화 안에서 원형(강길우)과 그의 아버지(이태훈)는 밤과 같은 사람들이다. 짙은 초록빛을 암흑 속으로 집어삼키는 밤의 세계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배가시킨다. <초록밤>에서의 몇몇 장면은 원형과 아버지를 어두운 배경 안에 두고 그 주변을 밝게 비춤으로써 두 사람과 외부환경을 대비한다. 불이 꺼진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는 아버지와 밝은 대낮의 빛을 받으며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김민경)의 상대적 명암을 강조한 장면, 집안을 환히 밝히던 조명을 모두 끄고 어둠 속 소파에 걸터앉아 홀로 바깥으로부터의 초록빛을 내리쬐는 원형의 실루엣 등에서 두 사람이 지닌 밤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 원형과 아버지는 침묵으로 그들 내면에 잠식한 불안을 외면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고모들이 격하게 싸우는 장면에서 원형은 그들과 거리를 둔 자리에 멀뚱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아버지는 부친과 내연관계인 노년의 여인에게 당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달라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원형과 아버지가 차마 표출하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은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담배 연기와 뒤섞여 내뱉는 한숨으로 두 사람이 숨통을 틔우고 있는 듯 보인다.

 

원형의 어머니는 <초록밤>의 등장인물 중 가장 생기(生氣)를 내뿜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녀를 붉은색과 화려한 꽃무늬로 표현한다. 시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나들이를 위채 단장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울 앞에 앉아 붉은 립스틱을 맵시 있게 바르는 그녀에게서 슬픔과 괴로움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초록의 대척점에 있는 빨강으로 그녀를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영화의 전체에 깔려있는 죽음(초록)의 기운에 저항하여 살아내는 인간(빨강)을 그리고자 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빨강은 혈액(血液)을 연상시킨다. 피가 온몸을 순환함으로 생명이 유지되듯 그녀의 움직임 덕분에 원형과 그의 부모는 가정을 유지한다. 침묵하고 외면하는 남편과 아들을 대신하여 시누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도, 시아버지의 정인(情人)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녀의 타성에 젖은 책임감도 결국 폭발하고 만다. 시골집에서 돌아가는 길, 고요함을 깨는 충돌음. 차와 부딪힌 들개가 남기고 간 혈흔과 움푹 파인 차체 앞에서 그녀는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내뱉는다. 무성한 녹음(綠陰) 속에서 그녀는 방금 전 사고를 당한 들개와 마주 보고 있다. 온몸이 찢겨 피 칠갑을 한 야생동물과 그녀의 붉은 재킷이 겹쳐 보인다. 상처받는 몸으로 꾸역꾸역 살아내기 위해 버티고 서 있는 두 생명이 서로를 보며 흘린 눈물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시골에서의 사건을 마무리하고 원형의 가족, 집에 도착한 그들은 차에서 내려 각자의 짐을 챙겨 한 명씩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세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눈 맞춤도 없이 적막만이 흐른다. 그들 뒤에 우직하게 자리한 초목의 무리는 바람에 이끌려 살랑거린다. 현악의 연주에 맞춰 춤추듯 보이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에 왠지 모르게 스산하고 음울한 기운이 풍긴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죽음의 예감이 끝도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아파트 야간 순찰하던 원형의 아버지 앞에 가로 봉에 걸린 밧줄이 보인다. 그는 교수대(絞首臺)에 올라선 사형수처럼 밧줄 고리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목에 줄을 매단 채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는 눈물을 흘린다. 관객을 향한 그의 눈에서 무력한 회한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밧줄 고리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초록의 밤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른다. 그렇게 다시 일상은 시작된다. 지난밤의 이야기는 묻어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작되는 하루가 축축하고 텁텁하게 다가온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