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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그들을 지치게 하는 것들 - 박형순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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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오발탄>(유현목, 1961)

그들을 지치게 하는 것들

/박형순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느껴질까? 갈 곳 몰라 하염없이 걷는 이는 철호(김진규)만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반복된 행동을 하고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택시기사는 철호에게 오발탄 같은 손님을 받았다고 투덜거리지만, 철호는 오히려 누군가 잘못 쏜 오발탄에 맞은 것처럼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다. 누가 쏜 탄환인지 생각해 보아도 영화 속에는 온통 철호처럼 지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갇혀버린 듯 무기력한 사람투성이다. 영화의 연출이 어떻게 등장인물들의 무기력을 보여주는지 생각해 보았다.

 

철호의 끌리는 발걸음. 카메라는 유독 움직이는 다리들을 많이 보여준다.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다리들의 순간적이고 빠른 움직임들. 하지만 철호의 다리는 영화의 진행에 따라 점점 느려지고 멈춰져 간다. 롱숏으로 보여주는 철호를 둘러싼 풍경들은 철호를 더욱 작고 무기력해 보이도록 만든다. 거리에 보이는 치과 간판들,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많은 물건들은 철호의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지만, 철호는 그것을 취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철호의 손에는 근심거리들만 닿는다. 경찰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항상 들고다니는 생계를 위한 가방이나 주판, 치통이 돋는 뺨, 부인의 비보를 담은 병실의 손잡이가 닿는다. 그것들은 마치 철호에게 걱정이 비어있을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손으로부터 전해진다. 계속되는 근심의 반복이 그를 쉬지 못하고 지치게 만든다.

 

영호(최무룡)를 가로막는 장벽. 다양한 형태들로 표현되는 장벽은 영호를 번번이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유독 영호 주변에는 그를 가로막는 기둥들,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계단, 깨부수어야 하는 영화사의 닫힌 유리창이있다. 아무리 장벽을 부수고 뛰어넘어 가려 해도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만 날 뿐 영호는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친구와의 우정이 흔들리는 순간에 발아래로 깨지는 사발과 설희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바닥으로 추락하며 깨지는 새 모이 그릇, 마지막 발악처럼 은행에 돈을 훔치러 갔을 때 총소리와 함께 깨지는 전구. 자신의 욕망이 터져버리더라도 앞을 향하는 영호에게는 기차 소리가 따라다닌다. 큰 소리를 내며 질주하고자 하는욕망을 드러내는 영호의 모습은 마치 철로 위를 질주하는 기차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같은 노선을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기차의 사운드는 영호를 가두고 답답하게 만든다.

 

집 밖으로 나가는 철호나 영호와 달리 집 안에 머무르는 인물들은 더욱 답답하게 갇혀있어 무기력함을 배가시킨다. 어린 해옥은 밖으로 뛰쳐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지만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나가질 못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아빠와 삼촌들에게 돈이나 신발을 요구하지만, 번번이 좌절된다. 영화 안에서 해옥은 오직 남성들에게만 말을 건다. 실질적으로 밥을 주는 엄마와 남성과 똑같이 돈을 버는 명숙과 함께할 때는 침묵한다. 여성은 집 안에만 존재하고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는 구시대의 관습이 해옥으로 하여금 더욱 남성들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해옥의 욕망은 집 밖으로 나가는 남성들의 실패와 무기력의 촉매가 되어 빈손으로 집 안에 돌아올 뿐이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약자라고 불리는 여성, 아이, 노인은 마치 보호받는 듯 집 안에 액자화된 이미지로 한 화면에 묶인다. 하지만 정작 보호되지 못하는 현실에 그 이미지는 억압처럼 어떤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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