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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 리뷰 :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삶의 오묘한 향방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5. 1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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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삶의 오묘한 향방

 

영화 <우연과 상상>은 제목 그대로 '우연''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에 담긴 세 편의 이야기는 소재(예기치 못한 만남이 야기한 삶의 변곡점)가 같다는 것 말고는 표면으로 드러난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등장인물과 중심 사건이 각기 다른 독립적인 세 가지 서사가 같은 제목 아래 느슨하게 연결되어 마치 단편소설을 읽고 있는 감각을 선사한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표작 <해피아워><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긴 호흡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이 영화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40분 안팎의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 안에서 하마구치 류스케가 엮어낸 이야기들은 어떤 질감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 진다.

 

1<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얽혀버린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대담은 삼각관계라는 진부한 소재에 신선함을 더한다. 영화는 장소와 동선의 이동으로 메이코와 대화 상대 사이에 감도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메이코와 츠구미(현리)는 택시 안에서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다. 미소가 만연한 얼굴과 상대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빛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깊은 호감을 예감케 한다. 반면,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와의 대화에서 메이코는 카즈아키의 사무실을 이리저리 이동하며 대화한다. 메이코와 카즈아키가 쫓고 쫓기는 모양새는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 감정의 앙금과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한다.

 

최종적으로 메이코는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는 해결자로서 기능한다. 카메라는 세 사람이 대면하게 된 카페에서 메이코를 줌인하는 장면을 전후로 메이코의 상상과 현실을 담는다. 상상 속 메이코는 앞뒤 재지 않고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만, 현실의 메이코는 속마음을 숨기고 진실을 은폐한다. 경로는 다르지만, 상상과 현실은 모두 메이코가 홀로 남는다는 결말을 맞는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같은 결과를 낳은 까닭은 메이코의 선택으로부터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불가사의한 실타래를 풀어낸 혹은 끊어낸 메이코의 얼굴 위로 헛헛함과 개운함이 섞여 보인다. 그리고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이 만든 앞으로의 나날들이 메이코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츠구미와 카즈아키를 뒤로 하고 카페를 나서는 메이코의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2<문은 열어 둔 채로>는 내면에 숨겨둔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깨달음은 잔잔했던 감정의 호수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 발현된다.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있어 그것은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의 집무실에서 처음 일어난다. 나오는 세가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그녀의 내연남 사사키(카이 쇼마)를 대신하여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지만, 그 계획에 적극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가와에 대한 동경심을 전하려 그의 집무실을 방문한 것처럼 보인다. 나오가 세가와의 소설 중 (과감하고 적나라한 성행위를 묘사한) 인상적인 한 대목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세가와의 집무실에는 야릇한 분위기가 감돈다.

 

집요하리만큼 문을 열어두는 상태를 고집하는 세가와로 인해 바깥의 인기척이 나오의 낭독 뒤로 꽤나 직접적으로 들려온다. 나오는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글을 읽지만, 시간이 지나자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책 속의 문장에만 집중한다. 개방된 장소에서의 낭독은 우둔하다는 표현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나오에게 자신을 달리 보는 계기를 부여한다. 나오가 닫았던 문을 세가와가 다시 여는 장면처럼 세가와의 칭찬(듣기 좋은 목소리,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나오의 잠재된 능력이 분출될 수 있도록 억눌려 있던 그녀의 욕구를 해방케 한다.

 

3<다시 한번>은 아쉬웠던 과거를 마주하게 한 기적 같은 착각의 순간을 포착한다. 제론(Xeron) 바이러스에 의해 전자통신망이 차단된 가상의 현실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의 조우를 위한 토대가 된다. 지금과 같은 현실라면 나츠코는 전화와 이메일 또는 SNS를 통해 20년 전 헤어진 연인 미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적 정보 수집 기능이 차단된 상황에서 나츠코는 오직 직감만으로 아야를 20년 전 헤어진 미카라고 확신한다. 너무도 반가워하는 나츠코와 아야를 보며 이들의 만남이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고는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찰나의 마주침은 너무도 극적이었지만, 나츠코와 아야가 서로를 잘못 알아보았음을 알아차린 이후가 더욱 드라마틱하다. 아야는 미카가 되어 나츠코가 오래된 연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들어준다. 반대로 나츠코는 아야가 동경하던 동급생이 되어 아야의 고백을 대신 전해 듣는다. 두 사람의 역할극을 통해 행복에 대하여, 잘 지내고 있는 지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바로 이 순간에만 존재할 인연이기에 터놓을 수 있는 속내가 있다. 그런 이유로 나츠코와 아야의 대화는 진솔하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애틋한 눈빛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충분히 위로받고 해소된 마음만이 나츠코와 아야의 주위를 감돌 뿐이다.

 

종종 '만약'으로 시작하는 가정으로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마주한 또 다른 자신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이라는 현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음을 깨닫게 된다. 선택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인생에서 오늘의 불운이 내일의 행운이 되기도 하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하여 영화는 우연한 만남과 상상을 매개로 이야기한다. 세 편의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우연은 어찌 보면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여운이 밀려온다. 그 곁에는 달고도 씁쓸한 생()의 맛을 새삼스레 느끼고픈 욕구가 자리한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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