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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영화> 리뷰 : 함부로 아까워하지 말 것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5. 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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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영화>

함부로 아까워하지 말 것

 

당신과 같은 심장으로 숨을 쉬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는

하지만 결국 당신과 다른 당신이 아닌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카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뮤지컬 <레드북>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중에서

 

<소설가의 영화>는 감독 홍상수의 전작 <당신 얼굴 앞에서>의 연작처럼 느껴진다. 배우 이혜영이 주인공을 연기하고 출연 배우들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겠으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두 작품 모두 산다는 것에 대하여 헛헛하고 담담한 회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이 가진 폭과 깊이를 모르고 함부로 던지는 말 한마디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부여한다.

 

영화는 준희(이혜영)가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화려한 촬영과 편집 기술과 같이 영화라는 예술이 뽐낼 수 있는 기교를 덜어낸 자리에는 오롯이 배우만이 남아있다. 또한 흑백 화면과 강하게 노출된 조명으로 인해 인물들을 둘러싼 배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설정된 화면은 인물들의 대화에 좀 더 집중하도록 기능한다. ‘아는 사람들을 다 만난 것 같다.’라는 준희의 대사처럼 영화 안에서는 준희를 중심으로 의도와 우연이 뒤섞인 마주침이 연속된다. 그녀의 여정은 후배 세원(서영화)과 해후한 책방을 시작으로 전망대와 공원 그리고 분식집을 돌아 다시 책방에서 마무리된다. 카메라는 준희의 이동에 따라 자연스레 대화의 장소를 옮겨간다. 각각의 장소에서 영화는 준희의 과거 인연들을 현재로 소환시켜 지금의 준희가 지닌 삶에 대한 가치관을 조명한다.

 

준희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흐르는 정적과 대화 상대의 눈을 피하며 가방을 뒤지거나 머리를 매만지는 준희의 행동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호적이지 못한 상황 덕분에 준희가 감추고 있던 속내를 내뱉게 된다. 준희가 효진(권해효)과 양주(조윤희) 부부와 함께 공원에서 우연히 길수(김민희)와 만난 장면은 준희의 표출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영화감독인 효진이 배우 일을 쉬고 있는 길수에게 그녀의 젊음과 재능이 아깝다라며 하루빨리 작품 활동을 할 것을 권유한다. 효진의 말에 순희는 발끈하며 무엇이 아까우냐? 길수가 초등학생이냐? 어엿한 성인이 한 선택에 왜 아깝다는 말로 평가를 하냐?’라는 식의 반박을 쏘아붙인다. 일순 분위기는 얼어붙고 무거운 침묵이 그들 위로 내려앉는다.

 

일장 연설을 마친 준희는 급히 자리를 뜨는 효진과 양주를 향해 미안하다 말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미안함이나 후회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후련함에 가까운 감정이 짙게 풍겨온다. 쉼 없이 달리다 잠시 멈춰 선 누군가에게 세상은 하루라도 빨리 휴식을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라 등을 떠민다. 영화는 그런 세상을 향해 준희의 입을 빌려 괜한 참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날은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나가보자.

 

세원의 책방에서 준희는 현우(박미소)에게 위 문장을 수화로 구사하는 법을 배운다. 준희가 아로새기듯 수어로 반복했던 문장과 그녀가 만든 영화 속 길수의 질감(특히, 들꽃으로 만든 부케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닮아있다. 아마도 과장되고 예민했던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 담백하고 느긋한 지금의 나를 드러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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