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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에 탄 소녀> 리뷰 : 불도저를 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4. 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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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에 탄 소녀>

불도저를 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대신 갚는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다. 이를 주제로 한 작품의 예고편만 봐도 주인공이 부모의 죽음에 분노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특정 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무력감에 빠져 좌절하지만 이내 실마리를 찾아서 복수하는 전개가 그려질 만큼 뻔하다. <불도저에 탄 소녀> 역시 혜영(김혜윤)이 아빠의 죽음을 맞이하고 불도저를 타기까지의 과정을 전형적인 흐름대로 담아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스무 살 남짓한 여성인 혜영(김혜윤)이 복수의 주체로 등장하며 상투성을 교묘하게 피해 간다. 소녀가 마주하는 사회의 부조리함은 한층 더 막막하게 다가오고 이에 불도저 같이 대응하는 혜영(김혜윤)의 모습은 색다른 몰입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혜영이 폭행 사건에 휘말려 법정에서 재판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판사의 질문에 혜영은 사나운 말투로 없다고 답한다. 팔에는 용 문신을 가리기 위한 토시를 착용한 채 삐딱하게 서 있는다. 혜영의 거친 성격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혜영은 학교를 자퇴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법정 교육 이수 시간을 채우려고 건설 기계 운전 기능사 자격증 강의를 들으며 불도저 모는 법을 배운다. 일과를 마치면 아빠 본진(박혁권)이 운영하는 중국요리 식당에서 동생 혜적(박시우)과 함께 잠이 든다. 가난한 형편에서도 부녀간에 애틋함은 싹트고 아련한 회상 장면 하나쯤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과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혜영은 경마에 빠져 돈을 날린 본진을 원망한다. 본진이 아빠로서 조언하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너나 잘하라고 쏘아붙인다. 혜적을 데리고 집에서 나가 살 미래를 꿈꾼다. 본진을 자신의 보호자로 여기지 않던 혜영은, 예상치 못하게 본진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본진이 만취 상태로 도난 차량을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의식 없이 응급실에 실려 갔기 때문이다. 처음에 혜영은 아빠가 깨면 이야기해보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본진이 뇌사 상태에 빠지자 혜영은 어쩔 수 없이 뒷일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린 혜영에게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본진이 언제 깨는지, 보호자로 더 나이 든 어른은 없는지 물을 뿐, 혜영이 궁금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지 않는다. 혜영이 칼을 휘두르고 멱살을 잡으면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경찰은 정황상 본진의 자살이 의심된다며 혜영을 추궁한다. 혜영은 그럴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고의 경위를 파악한다. 본진을 궁지로 몰아세운 최영환 회장(오만석)에게 진실을 캐묻고 사과를 요구하지만, 경호원에 의해 붙잡혀 쫓겨난다. 혜영은 본진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삼촌에게 증언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삼촌은 혜영을 말린다. 누가 우리의 말을 들어주겠냐며 원래 다 참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삼촌의 만류에도 혜영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건드리는 세상을 향해 용 문신을 드러내 보이고 분노를 표출한다. 우리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대꾸하고 싶어도 속으로 꾹 참는 말과 행동을, 혜영은 해버린다. 이것이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다. 사이다 전개 뒤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혜영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현실이 뒤따라오며 가슴이 막막해진다. 혜영은 지치기도 하지만 결국 본진과 혜적을 지키기 위해 불도저에 올라탄다. 혜영이 처음 자격증 교육을 들으러 갔을 때, 여자는 이 자격증을 따도 사회에 나가서 활용할 일이 없으니 차라리 다른 강의를 듣는 게 어떠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혜영은 불도저로 세상에 균열을 낸다.

 

혜영의 행동이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이 무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땅한 학력이나 자본이 없는 혜영이 어떤 투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혜영은 맨몸으로 덤비고 불도저를 타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후 혜영의 삶을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앞으로도 혜영은 부당한 세상에 맞서 수없이 용 문신을 보여야 할 것이다. 불도저가 일으킨 흙먼지 속에서 맛본 복수는 어딘가 텁텁하다.

 

-관객 리뷰단 박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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