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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리뷰 : 나는 다이애나 스펜서!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3. 2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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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나는 다이애나 스펜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과 동화에서나 봤음직 한 아름다운 외모로 만인의 동경을 한몸에 받았던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왕세자비. 하지만 그의 완벽해 보이는 물리적 배경으로도 피할 수 없었던 불행한 결혼생활과 뒤이은 이혼,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이 참혹했던 최후의 순간 또한 많은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은 다이애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로 표피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 한 개인의 심연으로 침잠하여 기필코 찾고자 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폐쇄적인 왕실의 내부와 개인적 심리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 부분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는 다이애나가 경험하는 상황을 치밀하게 구성하며 그가 자아를 좇는 과정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크리스마스 연휴의 단 3, 3일만으로 영화는 왕실에서 외로이 고뇌하고 투쟁하듯 살아야 했던 다이애나의 처지와 심리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영화의 시작, 마치 무기를 수송하듯 긴장된 분위기 속에 별장으로 도착한 식재료와 군대를 연상케 하는 주방의 일사불란한 요리 과정에 이미 숨이 턱 막혀온다. 왕실의 모든 구성원들이 전용차를 타고 정중한 의전을 받으며 정해진 계획과 순서에 맞춰 샌드링엄 별장에 도착하는 모습이 이어지며 왕실의 질식할 듯 무거운 공기가 충분히 느껴진다. 이에 반해 다이애나가 홀로 스포츠카를 몰고 별장으로 향하는 자유분방한 모습은 대조적이다 못해 이질적이다. 이쯤에서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구성원에게 강요되는 규율에 순종하며 외부로 보여지는 것들에 치중하는 왕실의 가족들과 달리,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는 다이애나의 충돌이 필연적임을 모두가 직감한다.

 

먹고 즐기는 크리스마스 연휴라지만 3일의 일정은 모두 철저히 사전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각 행사마다, 심지어 매 끼니마다 입어야 하는 옷이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리 정해져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는 따뜻하고 편안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고 모든 행사가 보여지기 위한 것들 뿐이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다이애나는 몇 번이고 그들과 싸워보려 하지만 결국은 번번이 좌절하며,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욕구는 오히려 스스로를 향한 자학으로 귀결된다. 갈등은 점점 심화하여 다이애나를 옥죄어오고, 그를 감시하고 억압하며 통제하는 남편 찰스(잭 파딩)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과 직원들의 굴레 속에서도 다이애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들만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려는 그의 의지와 닿아있다.

 

이런 영화의 성패는 결국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경험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관객이 이를 공감하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 영화는 다이애나가 겪는 심적 고통과 그로 인한 고뇌, 그럼에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자아실현을 향한 의지, 그리고 끝끝내 정체성을 회복해내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앤 불린(에이미 맨슨)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심화하고 다이애나의 내적 갈등과 압박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음악 또한 바로크와 재즈로 왕실과 다이애나가 대비되도록 사용함으로써 서로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구분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특히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마치 관객이 다이애나의 곁에서 그가 겪었던 모든 고통과 갈등을 지켜보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극한의 절망에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몰렸던 다이애나가 드디어 자신을 속박하던 외피를 벗어 던지는 장면은 길고 무거웠던 긴장과 억압의 길이와 그 무게만큼 통쾌하다. 남편의 불륜을 상징하는 목걸이를 뜯어내고 자신을 허울뿐인 존재로 만들던 왕실의 화려한 옷을 허수아비에게 입힌다. 그리곤 낡고 오래됐지만 자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코트를 입고 어린 시절처럼 밝게 내달린다(이 부분은 자신도 엄연한 귀족 출신이라는 자긍심을 되찾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는 재미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꿩 사냥을 벌이는 무의미한 살육의 현장에 거침없이 난입하여 두 아들을 내놓으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왕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보통 사람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한다. 어느 드라이브 스루 매장에서 주문자의 이름을 묻는 말에 그는 주저 없이 스펜서라고 당당히 대답한다. 이제부터 그는 다이애나 스펜서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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