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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리뷰 : 침몰하는 난파선의 운명에도 그는 사랑을 한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3. 1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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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침몰하는 난파선의 운명에도 그는 사랑을 한다

 

신체가 부자유한 남자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는 줄거리는 솔직히 흥미로운 소재라고는 할 수 없다. 으레 그렇듯 위기와 역경을 딛고 목표를 달성한 주인공에게 감동해야 할 것만 같은 지루한 의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교적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서사 구조임에도 영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단 한 순간도 따분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한 인간의 삶에 빙의되어 실제로 체험하는 것만 같은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코(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시간으로 흐른다.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야코와 아웃포커싱 촬영으로 야코를 제외한 배경과 인물들이 뭉개져 있는 화면은 오로지 야코에게만 화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제한된 시각 정보 가운데 관객은 오로지 야코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막이 오르며 관객은 꿈에서 깨어나는 야코와 함께 야코의 세계로 진입한다.

 

야코의 하루는 시르파(마르야나 마이야라)와의 통화로 시작한다. 시르파는 당연한 듯 야코에게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고 야코는 간밤에 꾼 꿈을 이야기한다. 아침 식사를 할 때도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도 야코는 전화기 너머의 시르파와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상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하나 없음에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질감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진한 농도를 가늠하게 한다. 이에 더하여 화면이 암시하는 야코의 시야는 야코와 시르파가 나누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야코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갑갑하다. 안개에 뒤덮인 마냥 희뿌옇게 번진 시야 속에서 희미한 윤곽과 색감으로 주변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작업으로 다가온다. 다발 경화증을 앓고 있는 야코는 시력뿐만 아니라 신체의 운동기능까지 잃어가고 있다. 눈은 점점 멀어 가고 휠체어에 몸을 맡겨야 하는 야코가 절망으로 가득한 순간을 보낸다 한들 감히 비난할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 야코가 생을 포기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시르파이다. 턴테이블에서 흐르는 음악과 수화기 너머 연인의 음성에 맞춰 춤을 추는 야코의 눈에서 야코가 시르파로 인해 행복하다는 것이 너무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백 킬로미터를 사이에 둔 인연이 끊어지기는커녕 나날이 단단해지는 까닭은 야코와 시르파의 운명이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시르파 역시 야코가 그러한 것처럼 난치병을 앓고 있다. 빙산이 되고자 했으나 타이타닉이 되어버렸다는 시르파의 자조처럼 두 사람은 죽음이라는 바닷속으로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야코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을 보지 않은 이유는 자신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야코의 꿈은 야코가 지닌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꿈속에서 야코는 온전한 다리로 힘차게 달린다. 이윽고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던 야코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운다. 야코의 눈앞에 휠체어에 앉아 호흡기를 달고 덜덜 떠는 야코 자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달콤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현실은 너무도 쓰고 텁텁하다. 야코가 대마를 피우고 (방문 간호사를 <미저리>의 애니라 부르고 택시 기사를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에 빗대는 등의) 가시가 돋친 유머를 구사하는 것은 힘겨운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절망을 버텨내는 야코가 시르파를 만나러 밖으로 나선다. 시르파를 위해 기꺼이 부자유한 몸을 이끌고 택시와 기차 그리고 바깥세상의 난관들에 맞서 보겠다는 야코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실의에 빠져 울고 있는 시르파를 홀로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악조건이 밀려올지라도 그들의 운명이 비극 속에 피어났을지라도 야코는 그렇게 자유와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 불량배들의 협박과 길을 잃는 등의 역경 속에서 시르파의 집 앞에 도착한 야코는 연인에게 포장을 뜯지 않은 타이타닉 DVD를 건넨다.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두 연인의 모습에서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가 겹쳐 보인다. 침몰하는 난파선에 탑승한 것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하는 순간이 가련하리만큼 아름답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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