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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리뷰 : 자본이 할퀴고 간 자리에 새겨진 상흔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11. 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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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자본이 할퀴고 간 자리에 새겨진 상흔

 

박배일 감독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밀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왔다. <사상> 또한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이 재개발 지역구로 확정되면서 거리로 내몰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9년 동안 기록되었으며, 크게 두 명의 인물을 주축으로 구성되어있다. 감독의 아버지이자 30년 넘게 부산 사상구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박성희 씨, 만덕5지구 보상공동대책위 대표로 활동한 최수영 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오랜 시간 묵묵히 일해온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는 주로 철거 현장의 갈등이나 싸움, 밀려나는 자와 밀어내는 자의 이해관계, 연대, 화합, 투쟁 등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왔다. 하지만 <사상>은 조금 다르다. 감독의 카메라는 갈등하고 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밀려나는 자들의 가까이에서, 혹은 그들의 경계 안에서 더 깊숙하고 세밀하게 개개인의 삶 전체를 살피고 있다. 감독은 카메라 속 인물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음식을 건네어 받기도 하며, 심지어 직접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 움직인다.

 

영화는 아버지 박성희 씨가 감독과 마주 앉아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무뚝뚝한 톤으로 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서술하던 박성희 씨는 내심 부끄러웠던 것인지, 혹은 여태껏 지내 온 지치고 건조했던 삶 탓인지, 이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감독에게 이 이상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건가?”며 되묻는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했을 그의 긴 삶이 단 5분 만에 정리되었다. 평생 살던 삶의 터전과 이웃을 잃은 아버지는 산업재해로 손가락도 잃고, 축적된 노동으로 인해 몸의 병도 얻는다.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고, 아버지는 우울증에 시달린다.

 

또 다른 주인공 최수영 씨는 모두가 떠나간 폐허, 바람이 몰아치는 철골 구조물 위에서 밤새 농성하며 자리를 지킨다. 굴착기 기사였던 그는 어쩌면 재개발 현장이 많아질수록 일거리가 더 늘어날 사람이지만, 막상 자신과 주변 이웃들이 밀려나기 시작하자 더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의 생각보다 더 강력했으며, 세월이 흘러 그들과 함께하던 동료들은 하나둘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장애를 얻고 사상을 떠나게 된 그에게 사람들은 왜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했냐고 손가락질한다.

 

사상은 중의적이다. 부산광역시 사상구를 지칭하기도 하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감독의 사상(思想)을 뜻하기도 한다. 소성리 사드 배치 논란을 그린 <소성리>(2017),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에 관한 <밀양 아리랑>(2014) 등을 통해 자본의 논리에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 온 감독은 이번 작품 <사상>을 통해 자신이 걸어왔던 기록자로서의 길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문득 생각해본다. 재개발은 과연 누굴 위한 공적 사업일까. 그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왔던 일들이 바로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온다. 재개발을 통해 사람이 살아갈 아파트를 지어놓는데, 그곳에 입주하는 원주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사업일까. 그저 오래된 것을 밀어버리기에만 급급한 무분별한 개발 광풍이 아닌가. 박성희 씨의 병든 몸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과 부산 사상구의 사진을 겹쳐 비추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자본이 할퀴고 간 자리에 남겨진 것은 우리의 산 역사를 매장하고 남겨진 상처뿐이다.

 

-이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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