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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리뷰 : 함께 밥을 먹는 일의 의미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11. 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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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함께 밥을 먹는 일의 의미

 

영화에는 유독 밥을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해고에 맞서 5년이나 싸워온 농성장에서, 모처럼 휴가를 얻어 돌아간 자신의 집에서, 그리고 잠시 일을 하는 직장에서도 재복(이봉하)은 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동료와 가족을 챙긴다. 더이상 희망이 남아있지 않아 공연히 트집을 잡고 밥상머리에서 다투는 오랜 투쟁의 동지도, 밥만 얻어먹고 바로 타인이 되어 돌아서는 냉정한 동료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서야 비로소 한 밥상에 마주하는 것을 허락하는 야박한 딸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쌀을 씻고 밥을 지어 먹인다. 재복의 계속되는 밥 짓기를 보며 직장에서 해고되어 길거리로 내몰리고 가정에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노동자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밥 먹고 사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카메라는 묵묵히 재복의 곁을 따르며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어쩌다 이런 곤궁에 처하게 됐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부당해고 무효소송에 졌다고 밥상머리에서 티격태격하며 다투는 재복과 동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들은 노조를 만들 때부터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고, 소위 말하는 전문 시위꾼도 아닌데 억울함을 풀겠다는 단순한 소망이 1,800일을 훌쩍 넘는 길거리 천막 농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을 하는 한심한 사람 취급을 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고 싶지만, 재복의 현실은 재판에 져서 복직은 요원하고 당장 딸들의 대학 예치금과 롱 패딩 값을 고민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이다.

 

돈을 빌리는 대신 잠시 일자리를 얻은 곳에서 재복의 진면모는 더 명확히 드러난다. 냉랭한 동료 준영(김아석)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밥을 나누어 먹고, 그가 다쳤을 때 자신의 일처럼 챙기고 보살핀다. 법을 모르는 준영에게 산재 신청 서류까지 내밀며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돕는 정성에서, 동료와 연대하려는 마음과 더불어 지금은 비록 재복을 빈궁하게 만든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결코 그릇되지 않다는 믿음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재복이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대충 넘기는 유형의 인물은 결코 아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작업장에서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연장을 손질하고 정리 정돈까지 꼼꼼히 마무리하는 재복의 모습은, 그가 평소에 어떤 자세로 일을 해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재복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5년이 지난 지금은 계속 싸우는 것이 먹고 사는 길인지, 이쯤에서 포기하고 새로운 일터를 찾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길인지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상황(물론 5년 동안 그의 머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을 문제이긴 하겠지만)이다. 재복은 먹고 살기 위해, 가정을 지키려고, 일터를 붙잡으려 했을 것인데 이미 떠난 지 오래된 일터에 되돌아갈 수 있을지 막막하고, 딸만 둘이 남은 가정도 자칫 붕괴될 위기에 놓여 있다. 큰딸 현희(김정연)가 동생인 현빈(이승주)이도 나처럼 살게 할 거냐고 힐난하며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 요구하는 장면은 재복에게 깊은 고뇌를 안겨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재복은 결국 동료가 기다리는 농성장으로 향한다. 그는 아이들이 먹을 밑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가득 채워 넣고 고공농성장에서 찬바람과 맞서는 동료의 속을 따뜻하게 채워줄 밥과 국을 챙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나 함께 해야 할 동료들에 대한 연대 또한 중요하다는 듯하다. 더불어 딸들이 나처럼 살게 하지 않기위한 재복의 선택은 딸들 곁에 머물며 당장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투쟁의 현장으로 돌아가 사회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것은 임시 직장에서 떠나는 재복의 자리에 들어서는 고등학교 실습생의 불안한 모습에서 또 다른 자신과 준영의 모습을 예견한 후라, 그 부당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재복의 다짐이 느껴진다.

 

신나게 일하면서 남들처럼 살고 싶은순박한 희망이 넘기 어려운 장벽에 맞닥뜨려 주저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온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줄 이란희 감독의 수작이다. 모든 일하는 노동자들이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관객 리뷰단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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