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리뷰 : 그럼에도 불구하고…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1. 2. 5. 21:31

본문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을 갖기 쉬운 노동과 관련한 영화임에도 관객들이 공감하고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전설적인 영화 <파업전야>(1990)가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당시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의 주역이면서도 공순이, 공돌이로 천대받아야만 했던 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실감나게 재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화 속에는 노동자들이 당하는 온갖 열악하고 모멸적인 대우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재현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로부터 조장된 노노갈등을 걷어내고 연대에 나서는 엔딩은 많은 이들이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개봉된 이 영화에는 많은 시사점이 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작업장엔 외주화된, 안전보다 효율을 강요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리고 작업장 밖으로 밀려나는 노동자들 역시 죽음과 맞닥뜨리는 현실은 그대로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 작업장이 내근직까지 확장된다. <파업전야>에서 관리직으로 같은 노동자를 탄압했던 내근직이, 이 영화에서는 생산직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노동자이며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회사 밖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정은(유다인)이 경험하는 불안한 심리를 독특한 카메라 앵글과 음악을 통해 표현하며, 그가 겪는 정서적 고통을 감각화 한다. 밑에서 올려다보아도 까마득한 송전탑을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비춤으로써 그것은 낯설고 괴기스럽게 스크린을 채운다.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철탑이지만, 마치 천길만길 아득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시선을 제공한다. 거기에 더해 음악은 초고압 전기가 머리를 관통하여 흐르기라도 하는 듯 귀를 자극한다. 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송전탑이 내가 올라야만 하는 현실로 다가왔을 때 겪을 수 있는 심리적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느 쪽이 삶을 위한 선택인지 구별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의 묘사 역시 관객들을 고민과 갈등 속으로 끌어들인다. 송전탑에 오르는 일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이 두려운데, 그렇다고 그것에 오르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해고는 결국 정은에게 죽음으로 이어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다. 이성은 오르라 하고 본능은 오르지 말라 하는 철탑 앞에 선 정은의 주저하는 모습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이야기의 전개 또한 충격과 고통을 가져온다. 해고의 위협 속에 동료 간 생존을 건 갈등이 첨예해진다. 다행히 공동의 어려움 앞에 노동자들 간의 긴장이 해소되고, 비로소 진짜 동료로서 연대감이 형성되는 순간에 느닷없이 죽음이 그들을 덮친다. 게다가 그 죽음의 희생자가 바로 막내(오정세)라는 사실은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고용을 현실적으로 위협하는 경쟁자임에도 정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그 막내의 죽음은 관객에게 충격과 분노를 가져온다. 감독이 밝혔던 것처럼, 불운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오는 게 현실이다. 정은 역시 밥 굶어가며 코피 질질 흘려가며 일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가혹한 내용의 전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동료의 비참한 주검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내 자리를 차지한 동기로부터 그 막내를 밀어내고 정은이 살아남으라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곧이어 막내의 남겨진 어린 세 딸이 영안실로 들어온다. 이 장면은 자리에 그냥 앉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라도 지를 것만 같은 극도의 고통을 안겨 준다.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냉혹한 삶의 현실인가 싶은 생각에 소름까지 돋는다.

 

해고라는 사망선고를 듣고도 정은은 동료의 마지막 길을 지키려 송전탑에 오르고 전선에 매달려 생과 사의 경계까지 다다른다. 외줄을 타고 밝혀낸 섬의 불빛은 작지만 아름답고 거룩한 느낌마저 든다. 부모로부터, 동기로부터 해고된, 그리고 이제는 회사로부터 해고가 예정된 외로운 섬과 같은 정은의 삶은 다시 빛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계속 될 수 있을까

 

-관객 리뷰단 이호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