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처음 쓰는 영화비평 2] 윤희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 한석현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0:53

본문

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윤희에게>(임대형, 2019)

윤희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 한석현

 

눈이 내린다. 오타루에는 눈이 내린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언제부턴가 내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칠 것이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 그러나 마사코(키노 하나)는 말한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눈은 늘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그칠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 많이 봐왔을 그가 정말로 눈이 언제그칠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는 의문이 아니라 느낌이다. 매년 반복되지만, 그 반복을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반복의 시간을 내 몸의 시간으로 함께 하는 것. 죽은 시간이 아니라 펄떡이는 지금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는 눈을 치우는 이 시간이 곧 지금이다. 화장실 방향제 냄새가 났던 첫사랑의 남자는 평생 기억할 추억으로 과거에서 지금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그에게 과거는 잊힐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언제라도 불러올 수 있는 현재의 시간이다. 그런 그 앞에 조카 쥰(나카무라 유코)의 편지는 지금, 여기를 상실한 과거에 갇힌 시간일 것이다.

 

쥰은 윤희(김희애)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부쳐지지 않은 편지다. 쥰은 그를 따르는 료코(타키우치 쿠미)에게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며 살라고 말한다.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쥰은 윤희에게 당당하지 못하다. 윤희를 버리고 도망쳤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진정한 자신을 찾게 해준 윤희를 말이다. 이 슬픔 속에

서 쥰은 홀로 견디는 삶을 산다. 이런 그를 마사코는 꼭 안아 준다.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마사코는 쥰이 지금 이 순간을 누리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이를 드러내듯 고양이 쿠지라는 머물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머물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쿠지라는 두 사람의 포옹의 시간에 지금 이 순간을 부여한다. 이 순간 오타루에는 눈이 내리고 달은 은은하고 밤은 고요하다.

 

윤희는 기차를 바라본다. 기차는 점을 향한다. 끝이 어딘지 모를 소실점. 기차는 끝이 없는 점을 향해 기약 없이 달려가는 시간이다. 달렸고 달리고 달릴 시간의 축적. 영원의 시간. 영원의 시간은 삶의 텅 빔을 드러내고 지금 이곳을 사유케 한다. 윤희는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의 자신의 공허함은 끌어안지 못한 과거의 쥰 때문임을. 그는 쥰과 만났던 시간에 진정한 행복을 느꼈고 다시 오지 못할 충만을 만끽했다. 이것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그는 쥰을 사진에 담았다. 언제라도 지금, 이곳에서 꺼내 볼 수 있는 영원의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그러나 쥰을 찍었던 카메라는 버려진다. 쥰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는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리고 오빠의 소개로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이제 쥰은 잊어야 할, 아니 저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둬야 할 과거의 시간으로 박제된다. 이후 윤희에게 쥰과 헤어진 이후의 시간은 벌이었다. 그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딸 새봄(김소혜)로부터 자신은 엄마에게 짐이 되었던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죽은 시간만이 흐르는 앙상하고 외로운 삶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윤희는 저 멀리 사라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회한한다. 그리고 뭐든 참을 수 없어질 때를 만난다.

 

윤희는 술을 마신다. 바에서 홀로. 침묵 속에서. 이별 후로 처음 본 쥰을 아는 체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던 자신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만나던 쥰의 얼굴을 보고 과거의 추억에 침잠하고 있는 걸까? 바텐더는 물어본다. 친구를 만나보셨냐고. 윤희는 바텐더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자신의 희망을 고백한다. 아니 독백한다. 쥰과 모처럼 만나서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산책을 하고 집에도 놀러 갔다고. 이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솔직했으리라. 거짓 삶을 살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진심을 말한다. 그리고 윤희와 쥰은 만난다. 마사코와 새봄의 도움으로. 둘은 서로 어긋나며 잠시 머뭇거린다. 20여 년 전 둘이 함께했던 그 모든 과거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흐른다. 윤희는 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꿈속의 그 얼굴. 가까이 가면 좋은 냄새가 났던 쥰의 앳된 얼굴이 아른거렸으리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놨던 쥰과의 슬프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앙상하게 메마른, 과거에 구속된 현재만을 살아가던 윤희가 지금 이 순간을 만난다. 윤희는 눈물을 흘린 후 환하게 웃는다. 이후 둘만의 시간은 오타루의 눈과 달처럼, 그리고 밤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으리라. 이 만남 후로 쥰은 마사코에게 말한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윤희는 이력서를 쓴다. ‘고졸이라는 글자가 당당하다. 그리고 쥰에게 말한다.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잘못이 없었다고. 그리고 오빠에게 말한다. 나를 간섭하지 말라고. 스스로 살아가겠다고. 윤희는 쥰과의 과거를 끌어안고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이력서를 넣으려 대문 앞에 선, 동시에 딸 새봄 앞에 선 그의 웃음이 아름답다. 윤희의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 윤희의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