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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영화비평 2] 구실에 휘말린 사람들 가운데 - 박유나

SPECIAL 기획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2. 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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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2019년 11월과 12월 동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진행한 "처음 쓰는 영화비평" 워크숍 수강생의 글을 모은 비평집에 실린 글입니다.


<오발탄>(유현목, 1961)

구실에 휘말린 사람들 가운데

/ 박유나

 

영화 <오발탄>1950년대 전쟁 후의 혼란 속에서 버티듯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철호(김진규)와 영호(최무룡), 명숙(서애자) 세 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시대가 사람들에게 성별, 연령, 계층 등에 따라 요구하는 구실의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구실에 휘말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그것을 감당하는 다양한 방식을 각각의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관객에게 정답을 찾아내기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시대에 따라, 또 개인의 성향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태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의 나의 평가는 명숙에게 가장 호의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냄에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초반에 명숙의 연인인 경식(윤일봉)은 명숙의 오빠이자 군대 동기인 영호와 대폿집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경식은 군에서 얻은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황에 좌절하고 있다. 영호 역시 전쟁이 끝나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두 남자는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내다 한밤중에 헤어진다. 목발에 의지하여 내일을 알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을 짊어지고 걷고 있는 경식의 뒤로 명숙의 실루엣이 비친다. 명숙은 경식의 뒤에서 따라 걷는다. 명숙은 전쟁통에 군에 간 경식을 기다려왔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 돌아온 경식이 부상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괜찮아질 때까지 또 기다렸다. 명숙은 기다림에 대한 답변을 주지 않는 연인에게 서운함을 표하지만, 절대 그를 앞서 걸어가지는 않는다.

 

영화를 통해 느껴지는 당시의 시대는 명숙에게 남성을 의지하는 여성으로서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명숙은 그저 경식을 기다리기만 한다. 경식을 향해 명숙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 명숙의 경식을 향한 기다림이 일편단심 현모양처의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처럼 느껴진 까닭은 여인들에게 남성의 뒤에서 그들의 그림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게 요구되었던 시대를 영화가 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끝내 명숙은 경식에게 그를 향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한다. (경식에 대한 실망이 원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숙은 거리로 나가 양공주가 된다. 여느 날처럼 목발에 의지하여 길을 걷는 경식은 밤거리에서 미군들을 유혹하는 명숙을 발견한다. 경식과 눈이 마주친 명숙은 자신을 붙잡는 경식을 뿌리치고 뛰쳐나가 화면에서 사라진다. 달려가 명숙을 잡을 수 없는 경식은 손에 쥔 목발을 내팽개치고 주저앉는다. 연인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보여주는 이 장면을 보면서 뭉클함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슬픔이라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 명숙에 대한 뿌듯함 때문이었다. 경식의 뒤에 서서 경식을 기다리기만 했던 명숙이 처음으로 경식을 앞서 걸어간 순간이었다. 연인의 헤어짐을 그린 비극적인 장면이지만 이 장면을 시작으로 명숙이 제 발로 설 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뒤로 명숙은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밤의 생활을 한다. 통행 금지 시간에도 거리에서 돈을 벌다가 경찰에게 잡히고 만다. 철호가 명숙의 보호자로서 경찰서를 찾아오고 경찰은 철호에게 처신을 똑바로 시키라 당부하며 명숙을 풀어준다. 유치장 신세까지 지고 철호 덕에 풀려난 명숙의 태도에는 죄책감이 없다. 경찰서를 나와 그 앞에서 껌을 씹는 명숙에게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명숙은 철호와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어간다. 철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제 길을 걷는 그에게서 다시는 누군가의 뒤를 따라 걷지 않겠다는 결연함마저 보인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 세 남매는 저마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구실들에 휘말린다. 영호는 호기롭게 은행털이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철호는 영호가 저지른 사고들을 책임지기 위해 경찰서에 가야만 하고 출산 중에 사망한 아내의 소식을 감당해야 한다. 철호는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2개의 사랑니를 모두 뽑아버린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게 만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같다.

 

그러나 명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 있다. 가족들마저 명숙을 양갈보라고 비난하고 업신여기지만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살아낸다. 구실에 휘말려 허우적대는 철호나 영호와는 다르게 명숙은 시대와 상황이 자신에게 부여한 구실에 휩쓸려가지 않는다. 명숙은 세상이 자신에게 어떤 굴레를 씌어도 살아내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삶을 주고자 다짐하는 명숙의 실루엣에서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강인한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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