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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움> 리뷰 :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0. 7. 3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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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영화는 도입부에서부터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새끼 뻐꾸기가 등장한다. 다른 새의 둥지에서 태어난 새끼 뻐꾸기는 본래 둥지의 주인인 새끼 새들을 밀어 떨어뜨리고 홀로 둥지를 차지한다. 어미 새는 진짜 자식들에게 주어야 할 먹이를 새끼 뻐꾸기에게 먹인다.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뻐꾸기에게서 혐오에 가까운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바닥에 떨어진 새끼 새의 사체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소녀에게 젬마(이모겐 푸츠)는 대략 이런 내용을 말한다. 끔찍한 상황이지만 자연의 섭리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젬마와 톰(제시 아이젠버그)은 부동산중개업자 마틴(조나단 아리스)을 따라 욘더(Yonder)라고 불리는 주택가에 들어선다. 9번 집을 둘러보던 중 마틴은 사라지고 젬마와 톰은 욘더를 벗어나려 하지만 쳇바퀴 돌 듯 9번 집 앞으로 돌아와 있다. 영화는 그저 욘더 안에서 살아가는 젬마와 톰의 일상을 보여준다. 귀신이나 살인마와 같은 공포감을 조성하는 요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는 괴기스러운 공포가 진하게 배어있다. 완벽한 안식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을 마주한 젬마와 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두려운 감정에 휩싸인다.

 

욘더의 설계 디자인은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출구를 찾으려 지붕 위로 올라간 톰은 좌절한다. 9번 집과 같은 연한 민트색의 외관에 진갈색의 지붕으로 꾸며진 집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톰의 눈에 비친 광경은 단조롭고 인공적이다. 일상에서 마주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반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부담스럽다. 마틴이 자신 있게 말하던 가장 완벽한 안식처라는 욘더는 이상적(理想的)인 삶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공간은 이상(異常)한 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톰과 젬마가 맞이한 결말은 비극이다. 톰은 앞마당 잔디의 변화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땅을 파기 시작한다. 톰은 욘더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밤낮이고 삽질을 한다. 그러나 톰은 욘더를 벗어날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톰의 시체는 진공팩에 쌓여 그가 파놓은 구덩이에 던져진다. 결론적으로 톰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상이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었다는 게 인간의 생애와 섬뜩하리만큼 닮아있다.

 

젬마는 욘더에서 벗어나기 위해 9호 집 앞으로 배달된 남자아이를 양육한다. 소년(세넌 제닝스)으로 자란 아이는 끊임없이 젬마에게 자신의 엄마가 될 것을 강요하고 시도 때도 없이 고성을 내지르며 그녀를 괴롭힌다. 청년(엔나 하드윅)이 된 소년은 죽어가는 젬마를 엄마로 부르며 아이를 양육하고 나면 쓸모가 사라진 존재라 말한다. 젬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엄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에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단면을 젬마를 통해 드러낸다.

 

비바리움(Vivarium)은 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젬마와 톰이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 욘더는 바로 미지의 고등 지식 생명체가 인간의 존재에 관한 연구를 위해 조성한 일종의 비바리움이다. 감독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인간이 살아가는 생태 체제의 부조리에 대한 거대 담론을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감독이 영화의 제목을 욘더가 아니라 비바리움으로 정한 까닭은 어쩌면 자신의 의도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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