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경직된 절차탁마의 태도, 한 판의 자유로운 춤이 되기까지.
우리는 영화를 보며 캐릭터의 삶을 판단한다. 이 캐릭터, 저 캐릭터의 삶을 판단하고 들여다보면 어떤 캐릭터는 삶을 산다기보다 삶을 버틴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삶은 즐기고 만끽할 무대가 아니라 하루하루 그저 버텨내야만, ‘존버’해야만 하는 숙제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 극화되어 있는 캐릭터들은 종종 자신이 직접 삶의 운전대를 잡고 문제에 직면하거나 도전하고, 또 사건을 주도하기도 하며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어떤 캐릭터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주변 사건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며 참고 인내하고 버티면서 그저 상황이 나아지기를, 마음이 괜찮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은 분명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지난한 길일 것이다. 버티는 과정에서는 수단과 방법이 필요하다. 기댈 곳,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줄 곳 말이다. 보통의 일본 중년여성의 삶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이 영화에서는 생명수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가 그 소재로 등장한다.
남편 오사무(미츠이시 켄), 아들 타쿠야(이소무라 하야토)와 한 지붕 아래 살아가고 있는 가정주부 요리코(츠츠이 마리코 분)는 중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보통의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코골이가 심한 남편과 집안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들, 게다가 며느리의 병수발을 필요로 하는 시아버지까지...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넉넉해 보이진 않는다.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불안감이 엄습하던 때, 갑자기 남편은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린다. 남편이 떠난 이후, 아들은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했고 시아버지는 요양시설로 옮겨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남편의 가출로 인한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마트에서 일을 하며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사이비 종교 단체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어색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암에 걸렸다고 고백하며 치료비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상황만으로도 짜증이 나지만 그녀의 아들은 갑자기 연상의 청각장애 여자 친구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첩첩산중. 일하는 마트에서 만난 진상 고객은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매번 그녀를 짜증나게 한다. 과연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을까?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은 가족도 아니고, 일터도 아닌 바로 생명수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 ‘녹명회’이다. 그녀의 주변 환경은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그녀의 내면을 무너뜨리려고 넘보지만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녹명회’에서는 말 그대로 ‘절차탁마’의 태도를 견지할 것을 주문한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이 만든 고산수 정원에 눈에 보이는 물결을 새겨 넣으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그녀의 내면을 대변하는 그녀의 정원은 방해꾼들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인해 계속 망가지고 흐트러진다.
극 중에서 묘사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모습은 사뭇 우스꽝스럽게 다루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은 블랙코미디의 요소를 극 중에 삽입시키지만, 결국 이 사이비 종교 단체는 주인공 요리코의 정신상태와 실존을 수면 위로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한다. 이 사이비 종교 단체를 통해 주인공 요리코의 불안한 심리 상태는 관객들에게 더 이질적으로 전시된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는 사이비 종교 단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와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탐구하게 한다. 그녀가 섬기는 종교단체에 따르면, 인간은 한 방울의 물과 같다. 그 하나의 물방울인 인간은 영혼의 차원을 높여 바다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절차탁마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종교단체에서 말하는 정신 수양의 메커니즘은 일본 여성에게 암묵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요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리코가 같은 여성으로서 연대할 수 있는 존재인 직장 동료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참지 말고 더 크게 복수해야 한다는 것. 과연 요리코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화에서 각 캐릭터의 말과 행동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타인에게 전달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의 파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결국 본인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요리코는 뻔뻔한 남편을 증오한다.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연상의 여자 친구를 증오한다.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는 아들을 증오한다. 이 증오의 마음은 절차탁마의 태도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말미에 드디어 남편은 죽고, 아들은 떠났다. 비는 내리고 이제 그녀는 진실하게 웃을 수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집 밖으로 운송되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그녀는 아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아들에게 그 웃음은 이해될 수 없는 기괴한 웃음이겠지만, 그녀 내면의 고통과 인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따라온 관객들은 충분히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라도 충분히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기괴한 웃음과 함께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춤이 발산되기 시작한다. 그 춤은 지금까지의 삶을 버티어낸 그녀 스스로 자신이 바치는 의식이자 선물이다.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그녀의 춤사위는 주관적인 카메라 앵글을 통해 화려하게 보여진다. 그녀는 춤을 추기 전 처음으로 자신의 정원을 망가뜨린다. 창조는 파괴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자신의 경직된 내면으로 상징되었던 그녀의 정원은 이제 망가뜨려지고 흐트러진다. 자신을 괴롭히던 남편도, 주변 환경도 아닌 본인 자체의 의지로 정원을 직접 망가뜨린다. 그렇기에 그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다. 그녀는 힘든 터널을 모두 통과했고,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성취했다. 드디어 마음의 부대낌 없이 한판의 플라멩코를 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삶의 애환을 담은 춤 장르인 플라멩코를 통해 그녀는 결국 자기 삶의 소통을 한 판의 춤으로 풀어낸다. 경직된 절차탁마의 태도가 원했던 것은 결국 자유로운 한 판의 춤이었던 걸까. 영화의 엔딩장면 내내 쏟아붓는 장대비는 그녀의 춤에 부어주는 감독의 샴페인과 같다.
- 관객리뷰단 최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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