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맘보>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지금이어도
필자는 21세기 사람이다. 20세기를 전혀 겪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태어났을 땐 이미 20세기에서 넘어온 이들이 적응을 끝내고 난 뒤였고, 앞으로도 그런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겪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란스러움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가. 그것은 단호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이 말하는 '혼돈'과 '위태로운 청춘'에 공감할 수 있고, 또 그 시절에서 한참 지난 지금의 시선으로 흔들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많은 이들이 극찬한 육교 오프닝씬이 나온다. 서글픈 것 같으면서도 신나는가 싶은 오묘한 배경 음악부터 주인공 비키(서기)의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들린다. 아무리 헤어지려 해도 늘 그녀, 비키를 찾아내 돌아오라 애원하는 애인 하오하오(투안 춘하오), 그런 애인에게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마치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내레이션 속 육교를 걸어가는 비키의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웃고 있고, 자유로워 보인다. 모순적인 이 오프닝은 육교 계단을 내려가는 비키의 모습을 화면이 지켜보며 끝이 난다. 앵글은 영화 내내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들을 바라본다.
비키는 이 이야기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라고 한다. 지금 내레이션을 하는 현재 비키는 2011년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인지 내레이션은 본인의 일을 설명하는 것인데도 지극히 남의 일인 것처럼 무미건조하다. 아니, 조금은 서글퍼 보일지도. 복잡미묘한 비키의 목소리가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칫 자극적인 불행 포르노로 비칠 수 있는 이야기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이 내레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크게 특별하지 않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하오하오를 떠나지도, 어떻게 살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비키는 호스티스 바에서 월세를 벌어야 했다. '야설적'인 옷을 입고 돈을 벌기 위해 남자들 앞에서 허리를 흔드는 여성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금 시선으로는 꽤나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비키뿐 아니라 인물들은 전부 방황한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입에 담배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계속해서 자극을 좇고, 목표 없는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죽이기에 바쁘다. 비키 역시 잭(고첩)을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 여기에 갇혀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잭은 야쿠자지만 비키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이었다. 돈이 없어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팔아넘기고, 돈을 벌긴커녕 펑펑 쓰고 다니며 빚만 늘리는 하오하오도 그렇지만, 뒷세계 2인자인 잭 역시 비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긴 힘든 위치다. 하지만 하오하오의 집착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고, 방황하는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는 잭에게 비키는 속수무책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보다 더 이해해 주고 꽤 괜찮은 대안을 내어주는 잭이 일본으로 떠나자, 비키 역시 그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잠적했고, 비키는 그대로 혼자 남는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겪는 대만을 비키에 빗대어 표현한 듯하다. 그녀가 뚜렷하게 하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 폭력의 집착과 온갖 부정적인 것에 둘러싸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어떻게 벗어나는 듯싶지만, 다시 혼자 남겨지는 모습도 대만과 닮았다. 또한 동시에 막 성인이 된 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년들 역시 그려진다. 10년 후의 비키는 자신이 거리의 사람들 중 하나인 척 섞였다고 말했다. 잭이 말한 대로 평범한 삶을 되찾고, 본인을 괴롭히던 것들에서 벗어난 것 같다. 2003년에 개봉한 이 작품이 일부러 2011년 비키의 목소리를 빌린 이유는 어쩌면 그런 미래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2025년 다시 본 <밀레니엄 맘보>는 무조건 극찬만을 안기는 명작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분명 시사하는 바와 영상미, 그 모든 것의 배경에 깔리는 훌륭한 음악은 걸작이지만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와 지나치게 평면적인 '방황'의 소재는 아쉽다. 이 영화를 보는 2025년의 관객은 더 나은 방황을 하기를, 본인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어차피 모든 것은, 해가 뜨면 눈사람처럼 녹아 없어지듯 흘러가 버리니까.
- 관객리뷰단 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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