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아>
끊임없이 꺾여도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바짝 묶은 머리와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연습복 그리고 잔뜩 해진 토슈즈. 영화의 막이 열리며 처음으로 마주한 호리아(리나 쿠드리)의 착장을 보며 그녀가 무용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연식이 오래된 건물의 옥상에서 춤 연습을 하는 호리아의 자태는 마치 야생의 초식동물과 닮아있다. 팔과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드넓은 초원을 뛰노는 어린 사슴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영화는 헤드셋을 쓴 호리아가 듣고 있는 음악을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은 호리아가 헤드셋 너머의 어떠한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는지 알 수가 없기에 약간의 궁금함과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각 정보의 제약 덕분에 관객은 그녀의 몸짓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영화는 호리아의 무용으로 시작을 알리며 그녀의 여리한 몸에서 내뿜는 단단하고 강렬한 기세가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임을 암시한다.
알제리 국립 발레단에 입단하기를 꿈꾸는 호리아의 일상은 바쁘고 고된 시간의 연속이다. 발톱이 깨지고 발가락이 문드러져도 반창고로 발을 동여맨 채 발레 공연에 매진하는 동시에 호텔 청소 아르바이트에도 열심이다. 허투루 흘려보내는 시간 없이 부지런히 살아가는 그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부족한 교습비를 채우기 위해 호리아는 위험한 수단에 손을 대고야 만다. 야심한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불법 양싸움을 벌이는 도박장에 들어선 호리아. 대결장에 오르는 양들의 우위를 판가름하는 눈썰미가 좋은 것이지 호리아가 돈을 건 양들은 모두 승리를 거머쥔다. 호리아의 행운이 계속되는 동시에 불안함이 엄습한다. 불안함을 인격화한 존재(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큰 체격의 남성)는 호리아와 같은 도박장에 자리하여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한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목돈을 마련한 호리아의 기쁨도 잠시, 그녀를 쫓아온 ‘그’ 남자와의 실랑이 때문에 호리아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계단 아래로 밀쳐진 호리아에게 주어진 건 심각한 다리 부상과 실어증이다. 행운이 몰려온 줄 알았더니 불행이 덮쳐온 호리아에게 세상이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진다.
호리아의 사고를 기점으로 후반부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호리아의 좌절 극복기가 중심을 잡고 있다. 실패와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을 다룬 영화가 대부분 그러하듯 호리아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절망에 빠지지만 이내 좌절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힘을 낸다. 생의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삶을 시작하는 용기를 얻는 과정을 담은 영화는 분명 험난한 이 세상에 없으면 안 될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표피만 바꾸어 우후죽순 등장하는 이러한 영화의 익숙함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으로 흠뻑 젖은 영화임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 <호리아>는 아직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지 않은 현 세태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영화가 배경을 둔 알제리 사회는 오랜 내전의 후유증으로 계층 간 갈등, 국가기관의 부패, 가해자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법 제도 등과 같은 문제가 산적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여파로 약자(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만연하다. 물론 정도와 질감의 차이가 있겠지만, 호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성 차별의 환경은 우리 사회의 첨예한 젠더 갈등을 떠오르게 한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호리아는 오뚝이와 닮았다. 아래쪽을 둥글고 무겁게 만들어, 쉽게 쓰러지지 않도록 만든 장난감의 천성이 호리아의 저항을 가져다가 붙여 놓은 듯 매우 유사하다. 호리아가 수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부의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바로 차별과 억압 속에서 피어난 약자들의 연대이다. 테러 집단이 휘두른 창검 아래 희생되었던 여성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은 트라우마를 짊어진 채 손을 맞잡고 그녀들을 찍어 누르려는 권력에 대항하고 있다. 영화는 호리아와 동료들의 화려하고 웅장한 군무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녀들의 군무는 소냐의 넋을 기리는 의식처럼 보인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호리아의 절친 소냐는 끝내 날아오르지 못하고 물속에 잠겨 죽임을 당한다. 호리아는 소냐의 영혼만은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진혼제를 거행한다. 비록 짓밟힌 꿈에 목소리를 잃었지만, 호리아에게는 아직 움직일 수 팔과 다리가 있다. 호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이 엮어낸 아름다운 신체의 동작들에서 결연한 의지가 물씬 풍긴다. 수없이 약탈당하더라도 자유를 향한 그들의 갈망은 결단코 꺾을 수 없으리라.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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