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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크리스마스> 리뷰 : 아, 허무하고 허망하고 허탈한 인간의 삶이여.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11. 2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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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크리스마스>

아, 허무하고 허망하고 허탈한 인간의 삶이여.

 

 전쟁은 정말이지 극단적으로 몰인정하다. 전쟁에 휘말린 사람은 반복되는 무력과 폭력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규정한 적()에 맞서 대립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전쟁이 무르익어갈수록 전장 안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야 만다. 참으로 잔인하다. 그런데,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 진실로 상대와 맞서 싸우길 원한 적이 있던가? 애초에 적대관계는 누가 무엇을 근거로 세운 것일까?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맥락을 찬찬히 짚어나가다 보니, (푸념에 가까운)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렴풋이나마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등장한 깔끔한 군복 차림의 존 로렌스(톰 콘티)가 묵주를 목에 건 죄수 하라 겐고(기타노 다케시)에게 했던 말을 빌려보자면,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희생물이다. 고집을 꺾지 않는 (권력을 틀어쥔) 자들로 인해 누군가는 (원치 않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너무도 부조리한 세상의 이치 아닌가. 자존심과 욕심으로 뒤섞인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배자는 전쟁을 벌여놓고선 그 안으로 무고한 청춘들을 밀어 넣는다. 뭣도 모르고 전쟁터로 내몰린 존재들은 갈등을 불러일으킨 권력자를 대신하여 자기들 눈앞의 적군(이라 일컫는 타인)에게 원망과 분노를 분출한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주 배경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과 영국군 사이의 포용력(包容力)거의(0)에 수렴한다. 일어에 능통한 영국군 포로 로렌스가 제아무리 일본군과 영국군 사이에서 언어를 매개로 중재를 시도한들 이들 사이의 골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할복(割腹)을 대하는 견해 차이는 이들의 대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있어 할복이란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어내 자기 죗값을 치러내는 명예로운 행위이다. 하지만 영국군들에게 있어 할복은 처형당하는 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극한의 고통을 안기는 잔혹한 처사일 뿐이다. 그런데 할복을 두고 대치한 이들의 갈등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위태로움만 쌓여가는 나날 속에서 전우의 죽음에 의미를 새기려는 노력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모두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죽음의 공포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서로 다른 방책을 두고 일본군과 영국군은 한 치의 타협도 허용할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자신과 다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은 깡그리 무시한 채 자기들만이 옳다는 편협함은 전쟁에서 비롯된 메마른 마음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에 영국군 소령 잭 셀리어스(데이비드 보위)가 오고 난 후부터 일본군과 영국군 사이를 지탱하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다. 대립의 흐트러짐은 일본군 대위 요노이(류이치 사카모토)의 흔들림이 시작이었다. 포로수용소의 관리자이자 일본군의 정신적 지주인 요노이는 군인의 표본처럼 보일 만큼 심지가 단단한 인물이다. 요노이의 매서운 눈빛과 단단한 표정은 재판소에서 셀리어스를 마주치는 순간 맥이 풀린 듯 동공이 흔들리고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마치 첫눈에 반한 상대를 보며 넋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요노이가 다져온 무사의 신념은 셀리어스와 짧고 강렬한 만남 때문에 너무도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허나, 요노이는 부대를 이끄는 수장이기에 자신의 변화를 들켜서도 인정해서도 안 된다. 셀리어스를 편애하냐는 주변의 비아냥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병적으로 검술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이 그의 하릴없는 다짐을 대변한다. 전시(戰時)이기에 스치듯 지나간 마주침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고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기에, 한낱 순간의 감정에 심장이 널뛸 수 있는 인간이기에 요노이는 자신의 각오를 버텨내지 못한다.

 

 할복 시비를 시작으로 무기 전문가 명단 제공 거부와 라디오 밀반입 등의 사건이 쌓여가면서 일본군과 영국군의 갈등이 극에 달한다. 요노이가 앙다문 입으로 칼을 쥔 채 영국군 부대장을 내리치려는 순간, 셀리어스는 요노이의 앞을 가로막는다. 명령에 불복종한 포로를 처형하여 대장의 권위를 세우려는 그의 불안함을 달래듯 셀리어스는 요노이의 어깨를 감싸 쥔다. 설명할 수 없는 위로가 전해진다. (셀리어스의 의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치 요노이에게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그만하면 됐다는 말을 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셀리어스는 요노이의 두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요노이는 녹아내리듯 그 자리에 쓰러진다. , 그렇게 평화가 찾아오면 좋았으련만. 포로수용소의 밤은 죽음을 예고하는 서늘함으로 가득하다. 셀리어스는 요노이에게 저지른 행동 때문에 목 아래가 땅에 파묻히는 형벌을 당한다. 서서히 안광이 희미해지고 말라죽어가는 셀리어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인간에게 시간을 들여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아로새기는 잔혹함에 절로 몸서리친다. 전쟁은 결국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셀리어스와 요노이도 그럴듯한 죄목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탈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 않은가. 제아무리 명복을 빌어준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아집으로 똘똘 뭉친 권력자의 눈에는 결단코 보이지 않았을, 처절히도 아름다웠던 인간들의 이야기가 서글프게 사라져 간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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