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가장 찬란한 여름의 한 가운데
낭만과 폭력이 공존하는 세기말 한국, 주영(박수연)은 본인에게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무리하게 증량하라는 코치의 요구에도 따르고, 연습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코치는 돈을 받고 승부를 조작하는 인물이었고, 승리를 빼앗긴 주영은 억울하고 분한 상처를 안고 태권도를 그만둔다. 그즈음 예지(이유미)를 만난 건 운명이었을까? 소꿉친구 민우의 고백 쪽지를 대신 전해준 상대 예지에게 우연히 도움을 받은 뒤로 그들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서로만의 비밀을 간직한다. 그리고 주영 엄마의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으로 예지는 주영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아직 채 다 크지 않은 아이들의 청춘 이야기를 기둥으로 삼은 이 영화는 퀴어 로맨스와 당시 운동계에 만연했던 폭력과 부조리함을 절묘하게 엮어 한데 모은 세기말 청춘 영화다. 한제이 감독은 그때 그 시절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사용하던 소품을 최대한 구해 영화에 사용하고, 특히 주영과 성희의 집만큼은 많이 신경 썼다고 인터뷰했다. 그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은 향수를 느낄 수 있고, 겪어보지 않은 세대도 왠지 모를 추억을 상기할 수 있게끔 신경 쓴 흔적이 돋보인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크게 주영과 예지의 사랑, 그리고 주영과 성희가 공통분모를 이루는 태권도부다. 우연이 겹치고, 그것이 운명이라 믿게 된 둘은 서로에게 쌓여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너는 친구끼리 키스하니?” 대놓고 못을 박으며 상대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예지의 대사에서 그들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달라는 메시지까지 느껴진다. 이런 풋풋한 사랑 이야기와 대비되는 태권도부는 어둡고, 아프고, 비참하다.
승부조작을 당하고 폭력을 참지 못해 꿈을 버린 주영, 부모의 압박 속에서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공격하는 성희, 그리고 자신이 공격받지 않기 위해 부원들을 억압하는 주장 등 이곳의 아이들은 상처투성이다. 그 중심에는 코치(양지일)가 있다. 마치 그 당시 존재하던 부정적인 모든 걸 의인화한 것 같은 이 인물은 영화의 중반을 넘기며 원초적인 괴롭힘을 넘어 주영과 예지의 사랑까지 위협한다.
영화는 다분히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코치에게 성희롱을 당하던 성희를 구하고 주영이 경찰에 신고하려고 할 때, 예지는 그런다고 누가 우리의 말을 들어줄 것 같냐며 그를 말린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은연중에 깔린 생각일 것이다. 한 명의 움직임은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벅차고, 그가 걸을 길은 가시밭길인 게 뻔하니까. 하지만 주영은 그럼에도 움직인다. 목소리를 내고, 부조리에 대항하고, 계속해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싸운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감화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유의미한 결과를 낳는다. 영화는 이 과정을 극적으로 과장해서 연출하는 게 아닌 현실과 극적인 요소를 적절히 잘 섞어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풋풋하고 간질거리는 영화 전반부와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더 높아지는 폭력 수위와 노골적인 묘사가 불쾌함을 자아내고, 보기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점은 아쉽다. 당시 문제점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긴 하나, 더 신중하고 세심한 연출로 초반의 감성을 가져가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 하나는 단단히 마음에 남는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계속해서 상기된다. 서로를 다치고 아프게 만들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 그들의 사랑이 또 하나의 천국을 만들었다.
- 관객리뷰단 서수민
<최소한의 선의> 리뷰 : 벼랑 끝에 선 마지막 선의 (1) | 2024.11.07 |
---|---|
<잠자리 구하기> 리뷰 : 세상이라는 물 속에 빠진 내 자아 구하기 (1) | 2024.10.23 |
<국외자들> 리뷰 :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새 물결 (0) | 2024.09.28 |
<줄리엣, 네이키드> 리뷰 : 또다시 사랑이길 바라는 마음 (0) | 2024.09.28 |
<룩백> 리뷰 : 함께 그리자. (0) | 2024.09.2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