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 네이키드>
또다시 사랑이길 바라는 마음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이 지구상에 존재한 순간부터 자신이 지나온 시간이 켜켜이 쌓여감을 체감한다. 누적된 시간의 흔적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의 습성을 단단함으로 연마시킨다. 연약하고 말랑하여 작은 충격에도 흔들리기 쉬운 시절을 지나 외부의 충격에도 그 모양이 쉽게 바뀌거나 부서지지 않으리라는 견고한 태도가 삶의 중심에 자리 잡는 것이다. 한데 자신이 지나온 과거들이 만들었을 시간의 누층이 자신이 원하는 모양과 질감으로 형성되기만 하면 좋으련만 시간을 보내온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쌓여갈 때가 왕왕 발생한다. 번복할 수도 없고 수정할 수도 없는 무심한 시간의 지나침은 고스란히 회한과 미련으로 남아 시간의 누층에 촘촘하게도 스며 들어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 한 번쯤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부담일 뿐이고, 지난 과오에 대한 대가를 짊어진 채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만 있는 무감각한 나날들이 늘어가는 기한 없는 여정. 다행스럽게도 시간의 속성은 축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간은 흐름이라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흐르고 흐르다 보면 자신의 흐름과는 다른 갈래의 시간에서 흐르고 있는 누군가와 만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운명이라고도 하고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그 찰나로부터 인간은 빛을 잃은 삶에 색채를 얻기도 한다.
<줄리엣, 네이키드>는 애니(로즈 번)와 터커(에단 호크)의 만남이 서로의 삶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활력을 불어넣는 과정을 비춘다. 고향 잉글랜드 샌드클리프에서 지역 역사박물관의 학예사로 일하는 애니의 나날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매일 걷는 출근길과 그 길에서 마주하는 이웃 사람들과의 안부를 나누는 애니의 발걸음에서 아침의 생기보다는 피로가 느껴진다. 예의상 얼굴에 새긴 미소에서 약간의 지겨움이 배어있달까. 변하지 않는 일상과 더불어 연인 던컨(크리스 오다우드)의 무심함과 배려 없는 팬 활동 때문에 애니는 연인과 함께한 15년간의 세월이 무의미하다고 여길 지경이다. 애니가 보내는 무력한 일상의 근원은 (의도하지 않게) 터커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던컨은 1993년 이후로 활동을 중단한 미국의 음악가 터커에게 깊이 빠져 있는데, 직접 팬사이트를 운영하며 터커의 일대기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예찬한다. 영화의 첫 장면, 던컨이 자신의 사이트에 올린 터커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터커를 찬미하는 던컨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애정을 넘어선 광기 어린 집착이 느껴진다. 터커를 향한 던컨의 팬심이 이토록 열렬하니, 연인의 관심과 애정을 빼앗긴 여자(애니)가 그 연인이 애정을 쏟아붓는 대상(터커)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인연이 생기다니, 꽤나 흥미로운 설정이다.
애니와 터커가 가까워진 계기는 터커의 미발표 앨범 <줄리엣, 네이키드>에 관한 혹평으로부터 기인한다. 명반이라는 칭찬으로 가득한 게시판에 과감히 그저 그러하다는 감상평을 남긴 순간부터 애니와 터커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문자에서부터 실제 만남까지 이어지는 두 사람의 소통은 영화의 제목처럼 그간 꺼내지 못한 속내를 발가벗는(naked) 상호작용처럼 느껴진다. 터커는 애니 덕분에 그럴싸한 포장지에 숨어 외면하고 있던 (모친이 서로 다른) 자녀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시도를 한다. 기대처럼 뭉클하고 감동적인 화해의 순간은 없었지만, 터커의 시도가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오랜 과거, 갓난아이였던 자신의 딸 그레이스를 화장실에 내버려 두고 도망쳐버린 그날의 회한이 터커에게 아주 조금은 해소된 듯 보인다. (비록 그레이스는 터커의 연락과 변명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애니는 터커와의 만남으로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삶의 설렘을 경험한다. 관객은 터커와 만나는 횟수가 쌓여가면서 화면 속 애니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짙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상대의 눈빛 때문이려나. 애니는 터커 덕분에 오랜 기간 잊고 지내온 자신의 매력을 알아차리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대폭 상승하였으리라. 영화의 말미, 속에서만 품고 있던 런던에서의 삶을 실행에 옮긴 애니가 화면에 등장한다. 애니의 발걸음에서 영화의 초반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활기와 벅참이 느껴진다.
솔직히, 영화 <줄리엣, 네이키드>가 기존의 로맨스 영화와 다른 차별점에 대해 논하라면 애석하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이 별로 없다. 그동안 보아왔던 (가벼운 분위기의) 사랑 이야기에서 경험해 본 장면들이 비교적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맛의 무서움을 잘 알고 만든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맛본 적이 있어 새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이 좋으면 그것 나름대로 기분 좋은 경험이지 않은가. 정체되고 무미건조한 삶이 누군가를 만나 막힌 물길이 뚫리듯 예상치 않은 새길로 나아갈 기회를 얻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며 아직 살아볼 만한 인생이라는 조금은 뻔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말이다. 하여, 식상할 수밖에는 없지만 아직 그려지지 않은 애니와 터커의 미래가 완전한 사랑으로 흘러가길 바라고야 만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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