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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 리뷰 : 함께 그리자.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9. 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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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

함께 그리자.

 

 러닝타임 57, 이야기가 다 담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시간이었지만 <룩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간이다. 57분은 주인공 후지노(카와이 유미)와 쿄모토(요시다 미즈키)의 성장 과정을 담았고, 둘의 고민과 시행착오가 나란히 펼쳐지고 그 모든 걸 돌아보는 회상까지 보여주는데도 충분했다.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는 만화에 재능이 있다. 칭찬도 많이 듣고, 그 역시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을 가지며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다. 하지만 쿄모토의 등장으로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구도와 그림체, 디테일까지 초등학교 4학년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엄청난 그림 실력을 갖춘 쿄모토에 승부욕이 불타오른 후지노는 그 길로 노트와 작법서를 사 그림만 그렸다. 친구도, 운동도, 가족과의 시간도 모두 포기한 채 그림에만 매달리길 1. 이젠 그림도 훨씬 자연스러워지고 스토리텔링도 성장했지만 여전히 쿄모토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만할래. 안 그래도 주변인들의 걱정을 샀던 후지노는 미련 없이 그림을 관두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후지노는 종종 따분하다는 표정을 하지만, 평탄한 일상을 보낸다. 졸업식이 끝나고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알고 보니 쿄모토는 학보에 실린 후지노의 네 컷 만화를 전부 스크랩하고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의 엄청난 팬이었다. 사인을 받을 곳이 없어 바로 제 등 뒤를 내어주며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후지노의 만화를 사랑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자신과 달리 학생 신분을 이어가면서도 퀄리티가 올라간 것이 대단하다며 엄청난 관심을 쏟는 그에게 후지노는 만화 공모전을 나가기 위해 그런 것이라며 으스댔다. 그리고 그날,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와중에도 즐겁게 집으로 뛰어간 후지노는 다시 펜을 잡고 만화를 그린다.

 

 <룩백>, 등 뒤라는 뜻도 있고 회상이라는 뜻도 내포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 된 건 여러모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만화가가 직접 작품에 녹여낸 만화에 대한 열정, 사랑, 열등감, 자존심은 두 주인공에게 고스란히 담겨 만화를 그리지 않는 관객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순수한 노력에 공감하게 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로 점철된 이 영화는 제목과 관련되어 진행되는 내용이 단순 성장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목과 큰 시너지를 낸다.

 

 쿄모토는 후지노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르며 함께 성장한다. 그와 함께 만화를 그리고 인정받을수록 그림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고, 후지노 덕에 집에 틀어박히는 대신 밖을 나와 세상을 누볐다. 누구보다 후지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쿄모토는 이제 단순히 후지노의 뒤를 좇는 게 아닌 자신만의 목표를 가진다. 하지만 후지노는 제 뒤에만 있다면 힘들이지 않고 성공을 거둘 텐데 어째서 떠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대화 끝에 결국 쿄모토를 놓아준 후지노는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시작한 만화는 연재가 진행될 때마다 주간 1위를 거머쥐는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화까지 결정되며 큰 성공을 이룬다. 하지만 후지노의 마음 한 구석엔 늘 쿄모토의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런 후지노에게 쿄모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대학에서 작업하던 쿄모토가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텅 빈 쿄모토의 방 앞에서 후지노는 깊이 후회한다. 졸업장을 전해주던 그날 만화를 그리지 말아야 했다고, 자신이 쿄모토를 방 밖으로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하고 오열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영화는 쿄모토와 후지노가 졸업식 날 만나지 않았던 세계선을 보여준다. 그 세계에서의 쿄모토는 후지노와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미대에 진학했고, 묻지마 살인 피의자에게 공격받기 직전 가라테부 부장이 된 후지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 세계에서도 어찌 되었던 둘은 만나게 되고, 다시 함께 만화를 그리는 암시를 남긴다. 둘은 어떤 사건과 상황을 맞이하든 간에 결국 만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쿄모토가 놓친 네컷 만화 종이는 다시 방 너머로 쿄모토가 죽은 세계선의 후지노에게 전달된다. 이에 벌컥 방문을 연 후지노의 앞에 놓인 광경은 그의 연재작 단행본들이 빼곡히 꽂힌 책장과 어릴 적 사인해 준 옷이 소중하게 걸려있는 쿄모토의 애정 어린 흔적들이다. 후지노는 이 모든 걸 가슴에 품은 채 다시 그림을 그리러 간다. 영화가 시작할 때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마지막까지 후지노는 카메라에서 등을 돌린 채 열심히 만화를 그린다.

 

 만화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에 모든 걸 쏟아붓는 후지노 앞에 붙여진 쿄모토의 네 컷 만화가 꼭 옛날 후지노의 등 뒤를 받쳐주던 쿄모토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후지노는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잊는 것이 아닌 계속 회상하고 기억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간다.

 

- 관객리뷰단 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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