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히로야마(야쿠쇼 코지)의 하루는 단조롭다. 옆집 할머니의 비질 소리로 눈을 뜨자마자 바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양치부터 한다. 심혈을 기울여 면도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정갈하게 나열한 선반 위 물건들을 차례대로 소지하고 나간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동전으로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산 뒤, 차에 올라타 신중하게 출근길 노래를 고른다. 카세트테이프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차 안에서 하늘과 도쿄타워를 올려다보며 출근한 히로야마는 본인이 맡은 구역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며 일과를 시작한다.
그는 과묵하다. 하지만 과묵한 히로야마를 둘러싼 인물들은 평화롭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일투성이다. 거울로 사각지대를 비춰가며 열심히 청소하는 히로야마와 달리 그의 배짱이 동료 다카시는 되려 곧 더러워질 텐데 왜 열심히 청소하냐며 반문한다. 다카시의 당장 관심사는 오로지 연애인 것처럼 보인다. 다카시는 본인의 현재에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듯했다. 돈이 없으면 사랑도 할 수 없냐며 애인인 아야가 일하는 곳에 가지 못하는 본인을 자조하고, 히로야마에게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코 돈을 얻어내 간다. 그의 말버릇 중에는 ‘10점 만점에 몇 점’이란 비유법이 있는데, 매번 모든 것에 점수를 내리는 모습이 능력주의를 버리지 못한 현대를 드러내는 것 같다. 히로야마는 그런 다카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다카시에게 끌려다니느라 차 기름도 떨어지고 기름값도 없어서 곤욕을 치르고 루틴도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히로야마는 바뀌지 않는다.
다카시 다음엔 그의 조카 니코가 찾아온다. 소원해진 여동생의 자식이었던 니코는 엄마와 다투다 삼촌인 히로야마에게 왔다고 했다. 조카지만 니코는 꼭 자식처럼 히로야마의 루틴과 그의 성격, 취향 모든 게 잘 맞는 인물이었다. 같이 아침 일찍 나와 청소일을 하고, 점심을 먹으며 숲을 구경하고, 일이 끝나면 목욕하고 밥을 먹는 것. 음악 감상을 좋아하고 그가 읽는 책을 따라 읽는 모든 모습이 히로야마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니코와 히로야마 사이에도 히로야마가 스포티파이를 모르듯 니코 역시 카세트테이프가 생소한 것처럼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래서 히로야마는 니코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히로야마와 여동생의 세상이 다르다면, 니코의 세상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날 밤 히로야마의 연락을 받고 니코를 찾아온 여동생은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라며 권유한다. 여동생의 모습에서 히로야마의 집안이 꽤 부유하단 걸 유추할 수 있지만 왜 히로야마가 집에서 나와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히로야마의 과거가 풀리지도, 현재의 히로야마가 바뀌지도 않은 채 니코는 떠난다.
러닝 타임 내내 히로야마의 하루는 한 번도 처음 나왔던 루틴을 그대로 지킬 수 없었다. 때로는 목욕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때로는 문이 닫혀 있어 늘 가던 가게를 갈 수 없게 된 적도 있었다. 이는 평범한 듯 보여도 뜯어보면 각기 다 다른 우리의 일상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히로야마는 꾸준히 자신의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힘차게 밟고, 주말이 되면 밀린 빨래를 하고 그동안 찍었던 필름 사진들을 정리하며 자신을 채우는 시간도 갖는다.
그의 삶 역시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과 좋은 일의 반복이다. 미우나 고우나 정이 든 다카시가 갑작스럽게 관두면서 고생스럽게 일을 했지만,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사람은 히로야마만큼이나 성실하고 깔끔해 손이 덜 가는 인물이었다. 니코가 책을 빌려 가면서 다른 책을 찾아간 헌책방에서 불안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작가의 책을 새로 찾기도 하고, 단골 선술집의 주인장 전남편과 당황스러운 만남을 가지지만 생각보다 그와의 대화는 즐거운 편에 속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어떤 인물보다 변화가 적었던 히로야마는 본인의 입으로 직접 변화를 인정한다. 그리고 다음 출근 날, 어김없이 다시 뜨는 해를 보며 그는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의 술렁임을 느끼게 된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 다음과 지금을 구분하며 매일 다가오는 하루의 특별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날은 밝아도, 어두워도 모두 퍼펙트한 날임을 잊지 말자.
- 관객리뷰단 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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