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미지수> 리뷰 : 나의 우주가 사라질지라도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5. 16. 16:09

본문

 

<미지수>

나의 우주가 사라질지라도

 

 화판 앞에 앉아있는 지수(권잎새), 하얀 도화지 위에 약간 길쭉한 원을 그린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릴 모양이다. 그런데 지수는 그려진 원 위로 연필 자국만 덧대고 있다. 그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단다. 하릴없이 스케치를 반복하는 지수. 그녀가 그려놓은 원형 위로 영화의 제목이 드러난다. 또 다른 한 편에서 기환(박종환)은 꿈을 꾼다. 광활한 우주를 우주비행사가 유영하고 있다. 중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우주비행사가 두둥실 떠오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우주비행사의 헬멧에 비친 거대한 천체가 내뿜는 광염은 지구에 발을 디딘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하다. 별빛에 압도당하는 순간, 기환은 눈을 떠 현실로 복귀한다. 잠에서 깨어난 기환은 악몽에 시달린 것처럼 기진맥진하다. 영화 <미지수>에는 지수와 기환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언뜻 보면 두 사람에게는 접점 같은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우주라는 존재 안에 강하게 묶여 있다.

 

 미술학원 강사인 지수는 여느 날처럼 수업을 마치고 퇴근을 나선다. 고되지만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불 꺼진 집 안에 들어선 지수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고함을 지른다. 불청객은 바로 6년 전에 헤어진 그녀의 남자친구, 우주(반시온). 우주는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친구 영배(안성민)를 죽였다며 사색이 되어있다. 엄청난 사고를 저지른 채 무작정 지수를 찾아온 우주로 인해 그녀의 일상은 순식간에 혼돈에 휩싸인다. 화장실 욕조에 잠겨있던 영배의 시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가 아무렇지 않게 지수와 우주 앞에 나타나선 세 사람의 좋았던 옛 시절을 추억한다. 그러고는 영배는 다시 죽은 채 욕실에 늘어져 있다. 이번에는 우주의 엄마 신애(윤유선)도 영배와 함께 시체가 되어있다. 환시와 착각에 혼란스러운 지수와 함께 관객은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우주와 지수에게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 실제와 허상을 구분하기가 너무도 난감할 따름이다. 사실 대부분의 장면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상상에 기반한 가짜처럼 보인다. 혈흔이 남지 않은 시신들이 있던 자리(욕조와 욕실, 그리고 그들이 걸어 다닌 거실)와 엄청난 사태에도 무감정한 우주의 태도는 상황의 현실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이 상황을 단순히 지수의 환각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진다.

 

 아내 인선(양조아)과 함께 치킨집을 운영하는 기완은 배달 기사의 안전에 굉장히 예민하다. 통화를 하며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배달 기사에게 기껏 포장한 치킨을 건네주지 않는다. 배달이 밀려 짜증이 난 배달 기사와 남편을 달래며 배달을 보내려는 인선을 뒤로한 채 기완은 있는 힘껏 포장 봉투를 꽉 쥐고 서 있다. 대화를 거부하고 들리지 않는 TV 소리에 시끄럽다며 성질을 내는 기완의 모습이 너무도 답답하다. 그런 기완의 억척스러운 고집을 인선은 참아주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기완이 술과 안정제로 그가 불안을 견뎌내고 있음을 알기에 그러하리라. 인선의 인내는 들리지 않는 빗소리에 무너져 내린다. 기완은 배달 주문을 받는 인선의 전화기를 뺏어 들고는 비 때문에 도로가 위험해 배달을 못 보낸다며 주문을 거절해 버린다. 인선은 전화를 끊어버린 기완에게 어디 비가 내리냐고 울부짖는다. 방금까지 기완의 가게 안으로 밀려 들어온 거친 빗소리는 인선의 읍소에 자리를 내어주고는 이내 무심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빗소리는 지수가 창밖을 보고 선 장면을 잠시 거쳐 간다. 기완의 귀에만 들린 빗소리가 어쩌면 지수에게도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밀려온다.

 

 이윽고 영화는 지수와 기완을 지독히도 옭아매고 있는 우주의 사연을 드러낸다. 취업준비를 하던 청년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빗길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였다는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우주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사라진 우주의 존재는 지수에게는 그리움으로, 기완에게는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우주의 상실로부터 남겨진 지수와 기완은 기로를 알 수 없는 나날에 휘둘리고 있다. 호감을 표하는 이성에게 아직 마음이 어렵다며 새로운 인연을 거부하는 지수나 매일 같이 우주 속을 허우적대는 꿈에 시달리는 기완이나 우주를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부족한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와 기완은 우주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지수는 앞서 떠오르지 못해 그리지 못했던 우주의 초상화를 완성하였고, 기완은 나로호 발사 성공 뉴스를 보고 새로운 꿈(우주비행사를 향해 나로호가 날아오는)을 꾸기 시작한다. 상심과 절망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일지라도 살아남기 위해 발길질을 해대는 두 사람이 다시 한번 아름다운 우주에 당도하길.

 

- 관객리뷰단 박유나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