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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 리뷰 :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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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4. 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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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

 

 말씀은 읽히기 위해 적히는 것이기보다 들리기 위해 말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 말씀은 목소리에 실려 울려 퍼지는 만큼 세계를 형성했을 터다. 창세기에 따르면, 세계를 형성한 음성의 주체는 신이다. 음색을 묻기 전에 존재하는 목소리는 목소리의 진리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 세상에서 목소리의 진리는 존재감을 결여한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2022)고 복기하기보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고 증언하자. 목소리의 진리라기보다 목소리의 진실이 세계를 짓는다고 말해보자. ‘정순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를 짓는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는 진실을 현현한다. 정순은 부재를 선택한 목소리 또는 부재하라니 부재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며 세계를 연다. 그 소리는 엄마를 걱정하며 다그치는 딸의 목소리에 엄마를 부르며 터뜨리는 울음소리다. 울음은 결코 말이 되지 않는다. 엄마. 엄마가 부르는 엄마는 말이 없다. 그렇게 수많은 엄마가 정순을 바라본다면, 정순의 엄마가 듣는 정순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정순의 딸 유진은 더는 부재할 수 없는 목소리의 불씨를 지핀다. 정순의 몸이 거듭나는 사건이 소리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

 

 목소리를 앗긴 채로 남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목소리가 없어야 했던 여건에서 그저 듣기를 강요당한다. 정순은 듣는다. 목소리를 앗긴 말은 목소리를 앗는 말에 짓눌린다. 목소리를 앗는 말은 그저 강요한다. 듣기만 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목소리는 음색을 갖지 못한다. 미소를 잃고 온기를 잃는다. 목소리의 진실이 존재감을 결여한다. 입을 열어봤자, 목소리를 내봤자 소용없는 세상은 목소리를 앗긴 사람의 자발적무력을 기도企圖한다. 말해봤자인 세상에서 입을 다문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 편을 선호하는 저항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 바틀비(허먼 멜빌, 바틀비, 허먼 멜빌, 김훈 옮김, 현대문학, 2015)는 죽었고, 바틀비의 무위와 죽음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정순의 침묵은 정순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정순이 살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침묵의 입을 연다.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무위 대신 삶을 불 지피는 행위를 택한다.

 

 유진의 목소리가 정순이 묻어둔 불씨를 살린다면, 그 불씨의 온도는 어떨까. 정순은 목소리를 앗겼어도 잃지 않았던 미소의 온기를 조소의 냉기로 변환하며 억눌렸던 목소리를 불러낸다. 따뜻했던 노래는 차가운 외침이 되고, 정다웠던 춤은 일갈하는 몸짓이 된다. 보잘것없는 권력에 기생하는 젊은 남성 관리자(도윤)의 갑질을 웃어넘기던 정순, 사랑을 느낀 남자(영수)의 찌질한 자존심을 눈감아준 정순은 더는 웃어넘길 수 없고 눈감아줄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태초를 연다. 속옷 차림의 정순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는 영상을 다른 놈에게 보여준 놈(영수)과 낄낄대며 영상을 유포한 놈(도윤)과 퍼져나간 영상을 보고 수군거린 모든 공범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정순이 직접 핸들을 잡고 달리듯, 정순의 목소리는 부재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목소리 또는 부재할 수 없으니 존재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며 세계를 연다. 도로주행 연수중에 영수와 도윤 등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목격한 정순은 다음날 공장에 출근한다. 아무렇지 않게 작업복을 입고 작업장에 나선 정순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정확한 말로, 거침없는 몸짓으로 파렴치한 긴장이 숨긴 소리를 찾아낸다. 노래하듯 항변하고 춤추듯 몸을 던지는 정순은 목소리가 되는 몸이자 몸이 되는 목소리다. 같은 노래가 다른 노래가 되고, 같은 춤이 다른 춤이 되는 사건은 정순의 몸을 태초에 세운다.

 

 ‘미라는 영수의 목을 조르던 정순을 말리며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한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은 후련하진 못해도 아쉽지만은 않은 저항의 표식이 된다. 그러나 의문의 여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만하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정순이 인정하는 이만함은 무엇일 수 있을까. 이만큼 힘겨웠고 두려웠던 정순이 다시 여는 세계는 얼마큼의 힘겨움과 두려움을 떨궜을 때 가능한 만남일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유진이 모는 차를 타고 있던 정순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모는 차에 유진을 태우고 달린다. 그 사이 정순에게 일어난 사건은 눈물이 앞을 가리는 만큼 아리다가도 비 온 뒤 갠 하늘이 더 맑은 만큼 벅찬 감정을 동력 삼아 끝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계속 달린 덕분에 이만큼 열린 세계로 나아간다. 끝낼 수 없어 멈추지 않은 정순이 나아간 만큼 열린 세계는 오직 나를 위한 내일의 연속이다. ‘가장 정순답게 빛나는세계의 확보다. 세상의 모든 정순이 여는 세계의 태초들, 수많은 목소리가 앗기지 않는 편을 선호하고 부재하지 않는 편을 선호해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목소리의 진실이다. 진실된 목소리가 목소리의 진실을 말하는 곳. <정순>은 잃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목소리의 태초이자 태초에 목소리가 있다는 진실의 소재所在. 세상의 모든 정순에게 세계를 여는 목소리의 진실을 호소하는 지금-여기의 현실이다.

 

- 관객 리뷰단 한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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