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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 섬세한 손길로 움켜쥐는 덜미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4. 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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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섬세한 손길로 움켜쥐는 덜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팬이라면 쌍수를 들 영화가 개봉되었다. 천재적 역량과 감성은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스타일로 돌아온 감독은 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 당신, 날 전부 안다고 생각했지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대립,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의 공생을 다루는 아주 친숙한 소재의 영화로 비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의 순리처럼 관객은 감독의 지휘 아래에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들을 연상하면서 시골 마을의 주민들과 그곳을 개발하려는 도시 사람들 간의 대립을 지켜본다. 그러나 그것이 주축이 될 것이라 섣부르게 짐작하다 보면, 한 가지 깨달음이 스친다. 도쿄의 사람들이 설명회를 위해 마을에 방문하는 사건이 전개되기 전까지 관객은 절대 인물들과 가까이 있지 못했다. 영화의 전반 내내 자리하던 기시감은 카메라의 의도된 배척에서 비롯된다.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등장 이전 앵글은 인물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거나 자연물의 뒤에 위치하면서 관객에게 거리감을 부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영화적 앵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글램핑 캠핑장 건설 설명회부터이다. 이로써 관객은 우리가 주민보다 외지인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그리고 스크린 바깥의 외지인들을 차분히 이끌던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의 태도처럼 영화는 중도로 전개된다. 사운드 활용, 화면 전환, 심지어 시골 마을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의 발발까지 어느 것 하나에도 과함이 없다. 같은 장면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개성적인 쇼츠가 분명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균형이 중요하다던 타쿠미의 조언을 이행하며 느린 호흡으로 이어진다. 장면들은 상호 연결되며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각자의 방법들을 다룬다. 땔감, 새의 깃털, 오가피나무, 강물로 맛을 낸 우동... 그리고 사슴. 사슴이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 바는 크다. 사슴들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영화의 중심부에 굳건히 자리한다. 마을 외곽에서 간혹 이루어지는 사슴 사냥은 자연을 해치는 인간의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타쿠미가 사슴을 존중하는 방식은 또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과 공생해 온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존중과 배려 말이다. 그것을 잊은 외지인에게 타쿠미는 글램핑장의 건설 부지가 사슴이 다니는 길목이기에 부적합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도쿄에서 온 두 사람은 대화의 속뜻까지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인간을 피하는 사슴의 습성이 결국 사슴을 내쫓을 거라고 말하는 그들의 순진한 얼굴은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이 무심함을 타쿠미는 조용히 되짚는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글쎄요. 어디로든 가지 않을까요?”

 

 그래서일까? 결말을 마주할 때 우리는 감독을 향한 배신감과 예견의 적중 사이에서 갈피를 잃게 된다. 실상 감독은 단 하나에도 괜찮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가 구성한 장면들이 너무나 평화로웠던 나머지 결말이 총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비틀거리던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주인공의 행동 변화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는가? 아니, 애초에 변화랄 것이 있었나? 사슴이 평소에는 절대타인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던 타쿠미의 대사는 이 지점에서 다시 떠오른다. 야생 사슴이 인간을 해칠 가능성은 전무하며, 만일 있다면 그것은 총에 빗맞은 사슴이거나, 새끼 주변의 부모 사슴일 거라고 했던 그의 설명은 결말과 어우러지며 아이러니한 심상을 잣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이 영화의 중추로 자리하던 대립은 자연과 인간, 도시와 시골, 주민과 외부인이었다. 타카하시는 집요하리만치 그들에 속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민이 되려 했으나, 진정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은 오히려 마유즈미였다. 후배에게 바른 조언을 하거나, 옳고 그른 행동의 정도를 안다는 점에서 타카하시의 인격적 측면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 외지인이며 주민들과 야생동물의 시각에서는 자연의 파괴를 위해 배정된 대리자이다. 그들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의 일관된 표정은 그들 사이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내포하던 것이다.

 

 일본에서 사슴은 사자(使者)의 역할로 순수하고 신성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안갯속에서 그들이 본 다친 사슴이 곧 파괴될 위기에 놓인 자연이라면, 순수한 영혼으로 들과 숲, 동물들 틈을 노닐던 딸이 그래서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면, 우리는 타쿠미의 행동을 자식을 지키려는 부모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영화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제목마저도 감독이 스스로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밝혔으니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추측뿐이다. 우리는 안개 낀 평야에 남겨졌고, 그는 무거운 숨소리만 남긴 채 떠났다.

 

- 관객리뷰단 조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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