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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라이프 고즈 온> 리뷰 : 눈물의 여분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4. 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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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라이프 고즈 온>

눈물의 여분

 

 소실점은 막연한 끝을 내보인다. 실재하지 않는 소실점과 실재하는 끝. 길의 끝은 보이는 것과 달리 끝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평선은 땅의 끝 또는 하늘의 끝이 아니고, 수평선은 바다의 끝 또는 하늘의 끝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그 끝은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의, 상상하는 것이 두려운 슬픔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끝이라고 믿어버린 곳에서 시작되는 삶은 연명 이상을 해낸다. 그 까닭은 죽음이 끝이면서도 끝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사랑의 끝은 삶의 끝. 끝없는 상실이다. 그러나 끝과 시작의 맞물림은 사랑의 끝을 사랑의 시작으로, 삶의 끝을 삶의 시작으로 뒤집는다. 뒤집히는 순간은 아프다. 슬프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삶을 계속하는 사람은 그동안 흘린 눈물이 남긴 힘을 기억한다. 너를 기억한다는 것은 눈물의 힘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도록 등 떠미는 너의 부재는 사랑의 저편을, 세상의 이편이 아닌 저편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좋은다큐멘터리 영화란 무엇일까.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영화라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 영화든 영상미가 뛰어나야 한다거나 서사 구조(plot)가 탄탄해야 한다는, 애매하나 공공연한 조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조건이 좋은영화를 만들고, ‘좋은영화란 그런조건을 충족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품은 채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의 속도를 쫓았다.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에서 시작한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대화로 이루어진 팟캐스트에 기반을 둔 때문인지 보여주기보다 말하기에 충실하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이 카메라에 담고 스크린에 투사하는 메시지는 말하는 만큼 보여준다. 보여주는 만큼 말하기보다 말하는 만큼 보여주는 영화는 팟캐스트에서 실을 잣듯 뽑아내는 이야기에 띄엄띄엄 매듭을 묶듯, 매듭처럼 두드러지는 장면들을 그러모아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이라는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1999년 씨랜드 참사, 1987년 민주화 투쟁 희생자의 유가족들을 포착한 영화는 세월이 약이 될 순 없지만 안고 가는 시간은 약이라는 사실의 결을 들추고 어루만진다.

 

 말하는 얼굴들은 마주 보는 얼굴들이다. 마주 보고 말하는 얼굴들은 서로 위로하고 힘을 모은다. 말할 수 있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열린 장 팟캐스트에 착안한 영화는 들릴 길 없었고 들린 적 없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고 들리길 바라며, 힘겹게 그러나 힘주어 말하는 얼굴들을 오래 바라본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억울해서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 살기 위해 말할 수 있도록, 기성 정치 현실과 타협하는 언론에 부재하는 예술 실천의 몫을 영화가 할 수 있는 한 해내는 데 충실하다. 알리는 데 충실한 영화는 영상 매체의 매체 미학에 착목하기보다 영상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메시지의 미학에 착목한다. 예술이 윤리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겹겹이 포장된 윤리를 재생산하는 사회에 다른 목소리를 내고 다른 눈빛을 건네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포장을 완전히 벗겨내진 못해도 포장을 벗기려는 노력에서, 윤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용기에서 예술은 비로소 윤리적일 수 있을 테다. 그때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우리가 눈물을 나누고 이제 맞잡은 손을 놓지 않는 연대가 제 목소리를 내는 대안이 되는 예술, 연대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예술은 사랑의 표현이다.

 

 “192+α.” 2003218, 지하에서 화마에 갇힌 채 지상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재는 유족들에게 억울해서 살아가겠다는 힘을 불 지폈다. 희생자들이 남긴 것은 피해를 측정하는 숫자로 환원 불가능한 α.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한국사회에 끊이지 않는 사회적 참사,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빈번히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의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약이 없는 고통,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α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 몫은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눈물에서 시작한다. 얼마나 더 울어야 할까, 더 나올 눈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솟구치고 쏟아지는 눈물에서 시작하는 삶의 여정은 험난하다. 그러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은 상실을 안고 고통을 안고 억울함을 안고 가는 시간에서 점점 더 강해진다. 더욱 단단해진 우리는 제 목소리를 내고 다른 목소리를 듣고 안전을 되묻고 생명과 평화를 외친다. 눈물도 다 말라서 세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들이 모여 시작하는 우리의 세상은 저편의 사랑을 이편으로 끌어당긴다. 연대는 사랑을 모으는 일, 상실도 고통도 억울함도 등지지 않고 사랑으로 품는 일이다. 세월은 약이 될 수 없지만 안고 가는 시간은 약이 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 관객리뷰단 한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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