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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75> 리뷰 : 죽음이라는 선택지 앞에 삶이 있음을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4. 2. 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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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75> 

죽음이라는 선택지 앞에 삶이 있음을 

 

 영화의 시작, 초점이 맞지 않아 뭉개진 화면 뒤로 불 꺼진 복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번진 색점의 무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그 위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온다. 곧이어 엽총을 쥔 한 사내의 실루엣이 카메라 앞을 지나가면서 초점을 조정한 화면에는 난장판이 된 공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넘어진 휠체어와 여기저기 나뒹구는 가구와 집기들을 보며 화면 속 공간에서 벌어진 참극을 가늠해 본다남루한 행색의 사내는 너저분한 그 공간 속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다. 사내는 비장한 목소리로 예로부터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긍지로 여겨왔다며 '일본 사회의 미래를 위해 노인들이 사라져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긴 채 자신이 쥐고 있던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윽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표되는 '플랜 75'.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자국의 인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7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 죽음을 제공하는 새로운 정책을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영화 <플랜 75>는 다가올 현실에 정말로 일어날 법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국가 권력이 책임질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였을 때, 국가적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방책으로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자국민의 수를 조절한다는 묘수는 어쩌면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방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인류 사회체제에서 유약한 계층은 우선 보호하는 대상이지 배제와 제거의 대상이 아니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극한의 상황에서야 인간은 이기심이라는 본성을 발휘하거늘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도 각박해진 것인지 답답한 심정이다. 결국, 영화 속 근미래의 일본에서 벌어지는 (국가를 위한다는 위선으로 포장한) 극단적 이기주의가 낭떠러지로 내밀린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의 현주소를 은유하고 있음에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플랜 75' 공표 후, 영화는 미치(바이쇼 치에코)를 중심으로 해당 정책의 대상자와 그 주변인들의 사연을 보여준다. 미치는 자력으로 자신을 건사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78세의 고령에도 호텔 룸 청소를 하며 번 돈으로 자급자족하고 있다. 항상 자신의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미치의 성품 역시 그녀의 강한 주체성으로부터 발현된 특성일 것이다. 하지만 노쇠한 미치의 신체는 그녀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계단을 오르거나 야간근무(도로공사현장 교통안내) 중 잠시간의 휴식 중 난간을 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미치를 보고 있노라면 안쓰러운 마음에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괴로운 따름이다. 룸 청소 중 쓰러진 이네코(오오카타 히사코)의 여파로 한순간 직장을 잃은 미치는 수급자 신청도 마다하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그런 그녀를 받아줄 또 다른 직장은 보이지 않는다. 섬뜩하게도 늙은이에게 너무도 냉담한 사회에서 미치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죽음, 그 하나만 있어 보인다.

 

 영화에는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세 번 정도 사용된다. 처음은 오프닝 장면에서의 어지럽힌 복도 장면에 이어 나타난 또 다른 복도를 배경으로 한다. 청소 복장을 갖춘 미치가 청소용품을 정리하던 중 그녀의 왼편으로 시선을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가까워지는 렌즈 앞에서 불안이 가득한 미치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또 한 번의 응시는 '플랜 75'의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가 오랜 세월 연락이 닿지 않았던 삼촌 유키오(타카오 타카)를 만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삼촌에게 플랜 75’ 신청서를 받은 히로무는 그 후 삼촌의 집에 방문하여 식사를 나눈다. 자신을 배웅하는 삼촌을 돌아보는 히로무는 잠시 화면에 시선을 맞추는데, 히로무의 눈빛에서 안쓰러움이 감돈다. 마지막은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카와이 유미)의 통화 장면이다. 미치의 결심을 되돌릴 요량인지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얼마 후 요코는 미치에게 전화를 건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통화연결음을 듣고 있던 요코의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다.

 

 미치와 히로무 그리고 요코의 시선은 카메라 너머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꽂힌다. 불안과 원망, 애석함으로 물든 그들의 시선은 관객은 양심을 건드린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꺼림칙한 마음이 하나 떠오른다. 미치를 둘러싼 영화 속 주변인들처럼 차가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던가. 노인을 무시하고 불편해하고 심지어 불필요하게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비난과 경멸을 내비치지는 않았던가. 늙어간다는 자연의 이치 앞에 자신은 예외가 된 것처럼 먼저 세상을 살아온 존재들에게 무례했던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플랜 75' 집행기관에서 도망친 미치가 바라보던 하늘이 인상적이다. 붉은 태양빛이 번진 하늘은 일출(日出)인지 일몰(日沒)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노랗게 빛나는 바라보는 미치의 옆모습에서 또 다른 희망을 느낀다. 떠오르고 있던 지고 있던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그것만으로 살아갈 이유는 족하지 않은가 싶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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