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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리뷰 : 다름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깃들어 있다

REVIEW 리뷰

by 강릉독립예술극장신영 2022. 11. 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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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다름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상과 현실에 종종 삐거덕거리곤 한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면 서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사랑할 것 같지만, 현실에 발을 디딘 가족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산더미이며, 사랑이라는 감정은 의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러한 가족의 이상과 현실은 가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묶여 있지만, 그 안을 이루는 사람들이 각각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에 벌어진 간극이다. 때문에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의 모양은 각양각색이지만, 양영희 감독의 노력은 카메라로 보여진다. 그녀는 화면 너머에 선 가족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가족들의 진면모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어왔다. 이런 감독의 노력은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2011)와 같은 작품으로 남겨졌다. 양영희 감독의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 또한 그녀가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 양영희는 그녀의 어머니 강경희를 조명한다.

 

1940년대 중엽,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이내 분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국의 해방을 함께 기뻐하던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념의 차이와 권력의 선취를 두고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강경희는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으로 혼란스러운 고향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양공선을 만나 혼인을 하고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게 된다. 양공선과 강경희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 바로 양영희이다. 재일조선인 가족 안에서 성장해 온 양영희의 시선에서 부모의 행동과 선택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했다. 그녀의 부모는 재일본조선인총연맹 협회의 열혈 활동가로서 북한의 이념과 사상을 신봉하였고,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애국 교육의 명목으로 북한의 이념과 사상 교육에 열성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는 조국이라 말하는 북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음에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아들 셋 모두 북한으로 이주시켰다. 양영희는 그동안 목도했던 부모의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큼이나 어머니 강경희의 무조건적인 희생이 불편하다. 강경희는 북한의 가족들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년간 돈을 벌어왔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일을 할 수 없음에도 이웃에게 빌린 돈을 갚지 상황 속에도 강경희는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을 놓지 못한다.

 

강경희와 그녀의 딸 양영희가 북한으로 보내는 금액을 두고 (양영희의 일방적인 질책에 가까운) 다툼이 끝난 다음 장면에는 정성스레 음식을 만드는 강경희의 분주한 모습이 담겨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힌 화면의 분위기에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 물을 가득 채운 냄비에 마늘을 가득 채워 넣은 커다란 닭을 넣고 그것을 뭉근히 끓이며 거품을 걷어내는 강경희의 옆얼굴에서 약간의 설렘과 긴장감이 감돈다. 이윽고 양복 차림의 아라이 카오루가 등장하는데, 그는 양영희의 남편이자 강경희의 사위가 될 사람이다. 일본 놈과 미국 놈 사위는 절대 안 된다던 아버지 고() 양공선의 말이 무색하게 강경희는 반갑게 아라이 카오루를 맞이한다. 그리고 강경희와 양영희 그리고 아라이 카오루는 식탁에 둘러앉아 강경희가 만든 수프를 함께 나눈다. 오래도록 끓인 닭고기와 육수를 맛있게 먹는 아라이 카오루와 이를 지켜보는 강경희 사시에 흐르는 어색함이 아이러니하게도 보기에 편안하다. ‘수프는 이후에 두 번 더 등장한다. 두 번째 수프는 강경희가 아라이 카오루와 함께 만든 것이고 세 번째 수프는 사위(아라이 카오루)가 장모(강경희)를 위해 만든 것이다. 서로 너무도 다른 세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며 가족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세 사람으로부터 풍겨오는 애정은 진한 닭 육수처럼 깊이가 남다르다.

 

세 번의 수프와 함께 영화에는 또 한 번의 변화점이 존재한다. 바로 제주 4.3이다. 강경희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제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던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혼인을 약속했던 남자를 뒤로 한 채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강경희에게 남아 있는 제주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의 몸에 대검을 꽂고, 노약자와 임산부를 가리지 않고 기관총을 쏘아대던 공포의 장면으로 가득하다. 피와 한으로 얼룩진 고향의 기억을 강경희는 5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음성으로 전하고 있다. 양영희는 강경희가 묻어두어야만 했던 과거의 비극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지금도 어머니의 북한을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주에서 발견한 양영희가 울음을 참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물에는 슬픔과 해소가 섞여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을 품고 산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후련하기도 한 느낌이다. 제주 4.3은 양영희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에 비워진 마음의 퍼즐을 채운다. 그리고 역사의 비극으로 빗어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려는 힘을 부여한다.

 

-관객 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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